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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20 23:24:00

발행인칼럼_35

발행인칼럼_35

발행인 칼럼 35

샹소니에,
자크 브렐의 추억(Ⅰ)

샹소니에, 자크 브렐의 추억(Ⅰ)

•자크 브렐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배가 뒤집혀 숨진 시리아 난민 소년 알란. 시리아 소년 알란의 죽음

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난민들. 빨간 셔츠에 파란 바지 차림으로 바닷가에 엎드린 세 살 어
린이의 이름은 알란이다. 이 아이는 지난 9월 2일 아침, 터키
헝가리 한 방송사 여기자가 도망치는 난민을 의 휴양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알란의 아버지는 IS를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 피해 두 아이와 부인을 데리고 시리아 고향에서 터키로 넘어
갔다. 터키에서 다시 난민 보트를 타고 그리스로 들어가던 중
74 배가 뒤집혀 자신만 간신히 살고 부인과 두 아들을 잃었다.
알란이 누워 있는 저 해변에서 알란의 형과 엄마의 시신도
발견되었다. 일가족은 올해 초 캐나다에 난민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직 시리아에 남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
으면 말문이 막힌다. 시리아의 어린이들은 그나마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먼저 간 알란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유럽인들은 자
기나라 정부에 대고 “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고 소리쳤다.
난민 수용에 미온적이었던 나라들이 그나마 움직이기 시작
했다. 독일 메르켈 총리가 앞장섰고, 여러 나라에서 대책을
내놓았다. 내전만 4년 넘게 계속되고 있고 IS의 무자비한 양
민학살까지, 시리아는 생지옥이라고 한다. 올해 떠난 사람들
만 34만명이고, 수천 명이 알란처럼 탈출하다가 죽었다.

그 며칠 뒤 헝가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리아
의 한 축구클럽 감독이었던 모셴은 7살 아이를 안고 헝가리
의 난민수용소에서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그
는 IS로부터 도망쳐 헝가리까지 왔다가 수용소에 갇힌 사람
이다. 그 광경을 취재하던 헝가리의 한 방송사 카메라 담당
여기자 라슬로는 도망치는 모셴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남자를 계속 촬영했고, 이어 도망치던 한
여자아이를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 생생한 동영상이 유
튜브에 게시되어 세계인을 분노에 떨게 했다. 이 망나니 여
기자의 영상을 보면서 문득 60여 년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떠올랐다.

회복의 심리학 35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 가로수 잎이 하나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 탄환은
/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한 대목이다. 자크 브렐(Jacques Brel. 1929~1978)
59년 전(1956년) 10월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련 괴뢰정부
아래서 신음하던 헝가리 국민들은 자유를 위해 일어섰다. 소
련은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 15만명을 부다페스트로
보냈다.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와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
다. 11일 동안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시민들
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다. 그 뒤 괴뢰정부 대신
임레 나지(Imre Nagy) 수상이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그것도 잠시뿐 결국 수상도 소련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춘수의 시에 그려진 것처럼 그때 부다페스트에서는 시리
아 난민 소년 알란보다 더 비참하게 소년 소녀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헝가리 국민들은 참담
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난민을 발로 걷어찬 여기자의 조국은
불과 24년 전까지만 해도 시리아나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
이다. 세상에는 그 여기자처럼 보태주진 못할망정 숟가락마
저 빼앗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의 일에 달려
들어 형제애로 돕는 사람들도 많다. 부다페스트의 죄 없는 시
민들이 소련 공산당의 총칼로 유린당할 때, 부디 이들을 외면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노래가 나와, 그 시절 동유럽에서 벌어
지는 참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 죄책감에 시달리던 서유럽
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노래의 제목은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Quand on N'a Que L'amour. 콘토나 클라무)’. 연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형제애를 호소한 노래다. 노
래를 만든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샹소니에로 남은 자크
브렐이다.

75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자크 브렐. 그는 이렇게 연극 공연하듯이 몸짓을 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사랑만 있다면 이 추한 도시를 기적으로 채우고 햇살로 덮으리 /
(…)사랑만 있다면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를 아침에 벨벳 외투로 덮어줄 수 있으리 /
(…)사랑만 있다면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이 대포를 향해 말할 수 있지 / 노래만으로도
진군의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지 / (…)그리하여 우리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어도 /
친구여, 사랑의 힘만 있으면 이 세상 전부가 우리 손안에 있다네”

자크 브렐의 ‘사랑만 있다면’의 노랫말 일부다. 그가 남긴 롯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말아
숱한 명곡들 중에서도 울림이 가장 큰 노래다. 그 울림은 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숭고한 감정은 우
아직까지 세계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원작자 자크 브렐 리의 일상을 보다 의미 있게, 활력 있게 만들어준다.
말고도 영어, 프랑스어권의 많은 가수들이 지금도 이 노래
를 무대에서 부른다. 내로라하는 가수들도 이 노래만큼은 부다페스트에서 시민들이 쓰러져갈 때 어찌 손 쓸 수 없었
결코 가볍게 부르지 못한다. 자세를 바로 하고 온 정신을 던 서유럽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듣고 부르며 마음으로 그
모으고 사랑의 감정을 있는 대로 끌어내 오열하고 호소하 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하룻밤에 카바레를 열 곳
듯이 부른다. 그들은 이 위대한 노래에 경의를 보내는 것이 씩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야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벨
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자크 브렐을 비롯해 파트리샤 카스, 기에 출신의 무명가수 자크 브렐은 이 위대한 인류애의 호
셀린 디온, 자니 할리데이, 해리스 알렉소 등등 뮤지션들이 소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이 노래로, 시대의 불행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 절로 숙연해지고 맑아지고 또 좋 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뮤지션의 아이콘이
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래가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 되었다. 자크 브렐이 낸 첫 번째 음반은 겨우 200장밖에 안
지 들어가 울리기 때문이다. 특히 자크 브렐의 1961년 파리 팔렸지만 이 노래를 담은 두 번째 음반은 크게 히트했고,
올랭피아 극장 공연실황을 듣노라면, 우리가 이 나라를 비 프랑스 최우수 가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76

위대한 샹소니에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사람, 현대판 음유시인을 영 영업담당 중역으로 일하게 했다. 자크는 경제적으로는 탄
어권에서는 ‘싱어송라이터(singer-song writer)’라고 한다. 탄대로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포장지 회사 일은 그의 가슴
우리는 그 전형을 포크의 전설 밥 딜런에게서 본다. 프랑스 을 움직이지 못했다.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엔 시내 카바
어권에서는 ‘샹소니에(chansonnier)’라고 한다. 그 연원은 레로 가서 노래를 불렀다. 청년극단의 리더로도 활동, 생텍
매우 깊어 중세의 음유시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밥 딜런 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극단과 아마
에게 깊은 영향을 준 선배 음유시인, 20세기를 대표하는 샹 추어 가수들을 이끌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자선공연을
소니에의 전설, 그가 바로 자크 브렐이다. 하면서 사는 맛을 느꼈다.

자크는 벨기에 사람이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폴랑드르 지 그러던 어느 날 파리의 유명한 카바레에 오디션을 보러 갈
방 출신이지만, 그의 집안은 프랑스어를 썼다. 그는 있는 집 기회가 생겼다. 부인과 어머니는 그를 격려했지만 아버지
자식이었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아버지 로맹 브렐은 젊었 는 집안 망신시키는 광대노릇이나 하려 한다며 극구 반대
을 때 콩고로 건너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다. 아버지는 했다. 아버지는 자크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한푼도 대
브뤼셀로 돌아와 매형이 운영하던 포장지 회사의 주식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파리에서 실패하고 다시 브뤼
인수하고 공동사장이 됨으로써 번듯한 부르주아의 길로 들 셀로 돌아와도 그땐 절대 집안 문을 열어주지 않겠노라고.
어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회사에 취직시켜 자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파리로 건너갔다.

자크 브렐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걸 마다하고 맨 손으로 파리로 건너가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77

그날 노래불러 그날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

부인과 아이를 브뤼셀에 남겨두고 자크는 파리로 넘어 갔 그날 노래 불러 그날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 자크는 카
다. 몽마르트 언덕의 유명한 카바레 ‘트루아 보데’의 사장에 바레 일이 끝난 새벽이면 이 카페 ‘티르 부숑’으로 가서
게 오디션을 보러 간 것이다. 필립스(음반회사)의 예술국장 다른 샹송가수들을 만났다. 새벽마다 이 집에 모이던
이기도 한 카바레 주인 카네티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청년들은 모두 샹송의 전설이 되었다. 몽마르트의 이
조르주 브라센스, 세르주 갱스부르 등 그야말로 쟁쟁한 뮤 카페는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 카페 내부는 자크 브렐
지션들을 데뷔시킨 샹송계 최고 실력자였다. 자크는 기타를 의 추억들로 가득하다.
치면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다 듣고 난 카네티는 이
렇게 말했다. “당신이 만든 노래를 설마 당신이 직접 부르려
는 건 아니겠지요? 그 얼굴로 말입니다.” 자크는 작곡은 뛰
어났지만 노래 실력은 최고라고 말할 수 없었고, 외모는 샹
송무대에 오르기에 문제가 많았다. 이 카바레에서 간신히
데뷔는 할 수 있었지만 청중들은 무덤덤했다. 자크는 파리
시내 카바레에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만 대부분
외모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북해 연안 휴양지에서 열린 콩
쿠르에도 도전했는데, 참가자 28명 중 27등이었다. 한번은
운 좋게 공연무대에 설 기회를 잡아 네 곡을 불렀다. 다음날
신문에 이런 기사가 떴다. “자크 브렐에게 우리가 할 수 있
는 얘기는 브뤼셀로 가는 좋은 기차가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의 출발은 이랬다. 그날 노래 불러 그날 먹고 사는 처지였
다. 고정된 자리가 없어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날은 종일 굶
기도 하고, 방값을 못 내 거리에서 지새우는 날도 많았다. 아
버지가 기회를 주겠다며 불렀지만 마다하고 생활고 속에서
도 계속 노래를 만들었다. 마침 그의 가능성을 엿본 조르주
브라센스가 생제르망에 있는 ‘에셀 드 자콥’이라는 카바레
를 소개해줘 처음으로 고정 일자리를 잡았다. 이 집에선 그
의 노래가 통했다. 여기서 인기를 얻자 그를 불러주는 카바
레들이 많아졌다. 보통 하루에 열 집, 한 집에서 5곡씩, 하룻
밤에 50곡을 부르면서 터를 잡았고 실력을 키웠다. 제 한 몸
돌보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노래에 담았다.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어도 사랑만 있다면 모
두가 전쟁 없이,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노래, ‘사랑만 있다면’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때 그의 노래
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여러 나라에 메아리쳤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샹소니에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78

세계를 뒤흔든 절망의 연애노래 ‘날 떠나지 마오(Ne me ‘날 떠나지 마오’
quitte pas)’를 부르는 자크 브렐.
무명시절, 한번은 샹송가수들의 프랑스 전국 순회공연에 참
※이 글에 실린 자크 브렐 이야기의 중요한 사실들과 가했다. 하루에 한 도시씩, 여름 한 달간 진행되는 스케줄이었
한글로 번역된 노랫말들은 서울대 장승일 교수(불어교 다. 출연진에 카트린 소바주라는 여자 샹송가수가 있었다. 그
육과)의 ‘자크 브렐’ 평전에서 인용했다. 녀는 이미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차가 없던 자크는 카트린의
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그의 처지에 그래선 안 되는데, 차안
에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분이 일었다. 하지만 진지
한 사랑은 자크 쪽이었고, 카트린은 순회공연 기간 중 즐길 남
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눈치 없이 순진하기만 한 자크는 이
혼까지 결심했다. 공연 스케줄이 끝나자 카트린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아내에게 첫사랑의 남자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아내는 말없이 그를 품어주었다. 일생
동안 연애사건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아내는 그를 죽는 순간
까지 안아 주었다.

반복되는 연애와 실패. 자크는 1959년 세계를 뒤흔든 절망의
연가(戀歌)를 만들어낸다.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노래 ‘날 떠
나지 마오(Ne me quitte pas)’. 이 노래는 미국으로 건너가 ‘If
You Go Away’로 번안되었다. 여가수 니나 시몬의 절규는 세
계에서 공명을 일으켰고 그밖에도 프랭크 시나트라, 탐 존스,
브랜다 리 등등 대형가수들이 잇달아 이 노래를 차지했다. 번
안된 언어로만 22개 국어, 리메이크된 곡의 수가 거의 500개
에 이른다.

“날 떠나지 마오 / (…)이젠 더 울지 않으리 / 말도 하지 않으
리 / 그냥 저기 숨어서 그대를 바라보기만 하리 / (…)그대의
그림자가 되리 / 그대 손의 그림자가 되리 / 그대 개(犬)의 그
림자라도 되리 / 부디 날 떠나지 마오”

노랫말이 얼마나 비굴한지 에디트 피아프는 자크에게 “남자
는 이런 노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애절
한 노랫말, 처절하기 그지없는 멜로디, 지독한 절망과 포기의
분위기, 격정적인 톤으로 사람들을 붙들었다. 이 노래가 크게
뜨자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한 여인이 나타나 “이 곡은 바로
나를 위해 썼다.”고 인터뷰했다.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나 “그 여
자가 아니라 나다”고 했다. 자크의 부인이 논란에 쐐기를 박
았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여자가 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수십 명은 돼요.” 부인은 그렇게 받아 넘기면서 부족한 남편,
하지만 위대했던 샹소니에를 감쌌다. 자크 브렐은 1978년, 폐
암을 이기지 못하고 마흔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는 히바오아라는 섬, 폴 고갱이 잠든 곳 바로 옆에 누워 있다.

_자크 브렐의 추억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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