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25
여행의 권유
그랜드 캐년에 펼쳐진
수백 개의 산들. 대장
관에 압도되고 만다.
여행의 권유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리커버리) 대표 여행은 ‘권태(倦怠)’의 치료약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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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의 생물학적 나이를 알아볼 필요가 없다. 그는 늙었
다, 너무 늙었다. 그의 사전에 ‘경이로움’ 같은 건 없다. 모든
게 빤하기만 하다. 두근거림이 없는 삶, ‘권태(倦怠)’가 그의
일상을 지배한다. 의사가 손 쓸 수 없고 식이요법으로도 해
볼 수 없는 이 질병의 훌륭한 치료약이 있다. ‘여행(旅行)’이
다. 지금 살고 있는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
이다. 낯선 곳에 가면 익숙한 곳에서는 여간해서 느끼지 못
하는 여러 감각들을 체험할 수 있다. 해방감, 경이로움, 압도
되는 느낌, 노스탤지어 등등. 그때마다 우리는 살고 싶은 충
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아주 지독하고 고질적인 권태에 빠진 사람에겐 약
이 없다. 그는 여행을 가도 그런 드문 감각들을 체험하지 못
한다. 낯선 곳에서조차 그가 발견하는 것은 삶의 권태이다.
여전히 그 입에서 “사람 사는 게 어디나 다 똑같네.”하는 말
이 나온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모든 미스터리와 불편한 것
들에 대해 투덜거리기 일쑤다. 차라리 ‘조용한 절망’ 속에 웅
크리고 앉아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익숙하고 편한
회복의 심리학
상황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처럼 구제불능의 상태에 빠 지 않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인생인데 겨우 사무실과 비
지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한다. 좁은 집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한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무르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여행은 정말 우리를 권태로부터 해방시켜줄까? 그 효과
것들이 익숙해지고 편해지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이 에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 부처, 공자, 예수…그밖에 이
보이지 않는다. 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그 속에서 쌓 세상에 빛을 남긴 위대한 이름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모
인 찌꺼기들이 사람을 자꾸만 눌러 앉힌다. 아침에 일어 두 여행자였다.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들은 죽음을 무
나면 또 빤한 하루가 기다린다. 차라리 일어나지 않고 그 릅쓰고 그곳에 갔다. 낯선 곳에 뭔가 있기 때문이다. 낯선
상태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 곳으로 떠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다. 이런 권태는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권태는
인생의 적, 인생승리는 권태와의 싸움에 달려 있다. 신진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꾼 순례여행
대사가 필요하다. 우리의 감각과 영혼에 새로운 피를 넣 여행은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1986년 어
어줘야 한다. 바깥의 낯선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 좋은 방
법이다. 느 날, 대형음반회사의 중역이었던 38세의 한 브라질 남
자가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생장피에르포르’로 넘어 왔다.
여행본능 스페인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까지 700km
여행 온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싱싱해 보인다. 내 의 순례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하루에 20km씩
걸었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야심찬 여정이었지만 그
가 사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여행자들을 볼 때마 길에 신 같은 건 없었고 심오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가
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찾아오지?”하는 얘기를 자주 한 도 가도 끝없는 길, 황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들만이 그를
다. 하지만 내게는 이곳이 지루하고 답답할지 몰라도 여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행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여행자가 많은 곳 순례를 끝까지 마칠 수 있을 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은 활기차다. 낯선 사람들이 불어넣는 에너지로 충만한
것이다. 우리도 낯선 곳에 가면 생기가 돈다. 그래서 사 여정의 절반을 넘긴 어느 날, 그는 안내자로부터 “진정
람들이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여행하는 것 아닌가. 평생 선택받은 자는 마음속에 열정을 품은 사람이다. 그 열정을
자기가 사는 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겸손도 절약도 뭣 쏟아 뭔가 한 가지라도 행하는 것이 신께 한 걸음 더 나아
도 아니고 주어진 축복을 발로 걷어차버리는 것에 지나 가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
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해왔던 일들을 더는 할 수 없으리
라는 깨달음이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만족스러운
급여와 심리적인 안정,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바뀌기로 결심했
다. 그것은 자신의 꿈을 좇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비록 그것이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늘 마음속으로는 바라왔으나 뛰어들 용기를
내지 못했던 꿈, 그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순례를 마친 뒤 작가가 되었다. 38세 이전의 그
는 스스로 말했듯이 ‘단 한 줄도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
이었지만 순례가 끝나고 불과 6개월 뒤 근사한 작품을 만
들어냈다. 자신의 순례체험을 담은 소설 ‘순례자’이다. 주
인공은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 그의 소설들은 1억 부 이상 팔렸다. 그가 쓴 주요
작품의 줄거리들은 모두 순례여행에서 나왔다. ‘순례자’를
산티아고 순례길의 산골 ‘알토 데 산 로께(1270m)’에서 필자.
최근 한국인 순례객들이 부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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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의 여행자들.
제주 올레길과 수많은 둘레길
들은 바로 이 길에서 얻은 영
감으로 만들어졌다.
비롯해 보물을 찾아 떠난 양치기의 이야기를 그린 ‘연금술 은 그 길의 역사적인 맥락에 동의해서도 아니고 종교적 여
사’, 알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베로니카’, 피에트라 강가에 정인 것만도 아니다. 신을 찾으러 가는 사람보다 자신을
서 울면서 일기를 쓰는 필라의 이야기(‘피에트라 강가에서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사는
나는 울었네’) 등이 모두 순례여행에서 만들어졌다. 순례 곳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자신의 꿈을 발견하러 가는
여행은 일순간에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것이다. 그처럼 나 자신은 우주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다.
그 소중한 자신을 위해 우리는 여행한다. 코엘료처럼 잃어
자기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 버린 꿈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품고서. 그리고
그의 첫 작품 ‘순례자’는 세계 독자들의 가슴을 움직여 그 믿음이야말로 진정 숭고하다.
산티아고를 찾아가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반향은 컸다. 진정한 자아를 찾든, 잃어버린 꿈을 찾든, 지금 사는 곳
저널리스트였던 서명숙 씨는 그의 책을 읽고 순례여행을 에서 찾지 왜 굳이 그 먼데까지 가야하느냐고 물음표를 던
떠나 거기서 ‘올레길’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 지는 사람도 있다. 옳은 의문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아와 실제로 ‘제주 올레길’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않다. 자신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수많은 사람들, 현인들
의 수많은 올레길, 둘레길들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해마다 이 왜 여행을 했겠는가. 낯선 곳에서의 체험들이 자기 발견
한국의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에서 자극을 받아 순례여 또는 자기 인식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행을 가슴에 품고, 벼르고 별러 순례에 나서고 있다.
순례의 황금기였던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해마다
백만 명 이상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고 한다. 한동안
사라졌던 순례는 몇십 년 전부터 다시 시작되어 지금 부흥
하고 있다. 그들은 왜 순례길을 걷는가? 사실 산티아고 순
례길은 숭고한 영적 탐사의 길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역사
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길은 가톨릭과 이슬람의 전쟁
에서 비롯되었고, 그 길에 정치적 목적이 있었고, 전쟁 속
에서 발전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50만명씩 순례길을 찾는 것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대표작,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883년에 짓기 시작, 지금도 공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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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올라가면 마을이 잘 보이듯이 밖으로 나가면 자신
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스스로를 공중에 띄
워놓고 저 아래서 발버둥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더
넓은 곳에서,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자신을 관찰할 수 있
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
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여행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성공을 거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왜 여행하는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물 베키오(Vecchio) 다리.
사람들은 왜 여행하는가? 알베르 까뮈의 스승으로, 철 단테는 이 다리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났다.
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는 자신의 오랜 여행체험을
바탕으로 여행의 목적, 여행의 본질을 날카롭게 정리했다.
다음은 그의 글 ‘행운의 섬들’의 구절들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 (…) 자기 자신의 모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여행으로 이어지는 ‘달콤한 인
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생’을 꿈꾼다. 나이가 들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잊어버린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 생기고 이런저런 인간관계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 꿀
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 맛을 보리라고 생각하며 미래의 ‘언젠가’를 마음에 품는다.
고 나면 여행은 완성될 것이다. (…)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꾸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 만 뒤로 미뤄진다. 그때마다 할 일이 생기고 여유가 없다.
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 그 장 미루고 미루다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많다. 뒤늦게 여행을
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 즐기는 노선배들은 하나같이 “젊었을 때 많이 돌아다녔어
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며 그 악기의 위력을 야 하는데”하고 탄식한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서 서둘러 쫓기듯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는데’하는 후회
도 가장 참된 것이다.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 가 자리 잡고 있다. 여행을 가려면 지금 가야 한다. 지금이
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아니면 언제 따로 시간을 내어 여행을 다니겠는가.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
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멀고 긴 여행이 아니라 가깝고 짧은 여행조차도 세심한
계획을 세워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는 여행
자신의 꿈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젊은이들. 을 자주 다닐 수 없다. 아무리 계획을 짜도 낯선 곳에 가면
애초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 미스터리를
즐기는 것이 여행이다. 나는 지난 30~40대에 우리나라를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의 원칙은 토요일만 되면 무조건 떠
나는 것이었다. 어디를 갈지, 어떤 곳에서 잘지 따로 챙기
지 않았다.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떠났다. 그래서 여행
을 많이 할 수 있었고 내가 사는 나라를 좀 더 많이 이해하
게 되었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직업상의 성취를 가져다 준 수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었
다. 여행은 실로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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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海) 위에 건설된 물의 왕국 베네치아. 배 이외에 모터가 달린 운송수단이 허용되지 않는다.
“젊었을 때 더 많이 갔어야 하는데….” 그날이 오면 돈 오던 일을 더 열심히 더 진지하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 명예, 권력을 많이 갖지 못해 후회하는 것보다 더 많 일이 즐겁기만 하다. 이번에 다녀오면 또 다음 여정을 위
이 돌아다니지 못해 후회하게 된다. 가슴이 움직인다면 해 주어진 일에 몰두할 것이다.
지금 떠나야 한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자주 떠나야 한
다. 여행을 중심으로 생활을 재편성하는 것은 아주 좋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방법이다. 대신 포기할 것들도 많다. 무엇이 득이 될지 그 좋은 곳을 왜 어쩌다 한번 가는가. 우리는 자주 여행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해야 한다. 그리고 여행자의 가슴과 시선으로 매일 매일
여행은, 지금 하는 일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준다 을 살아야 한다. 한두 시간일지라도 내가 사는 곳을 매일
전화를 걸어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었더니 여행할 수 있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듯
이, 여행자의 그 시선으로 나의 집, 나의 일터, 내가 사는
“휴가 때 해외여행 가려고 지금 부지런히 일하고 있어 곳을 보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요.”하고 대답이 온다. 그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친다. 그 시작한다. 모든 사물에는 디테일(Detail)이 있다. 거주민
는 약간 들떠 있다. 여행을 앞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보인다.
주말에 여행 스케줄이 잡힌 사람은 주말이 가까워질수
록 싱싱해진다. 바라는 것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 여행을 통해 얻는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삶에 대해 여행
다. 지루한 일상에 적절한 긴장이 생긴다. 얼마나 많은 자의 시선을 갖는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10분만 걸
사람들이 이 긴장을 잃고 사는가. 생존의 압박과는 차원 어가면 숲이 있고, 도심이 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이 다른 싱싱한 긴장 말이다. 관광명소들이 있다. 그곳들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걷는
다. 자신이 어디에 살건 그런 명소들이 있을 것이다. 우
여행이 목표로 잡혀 있는 사람에겐 지금 자기가 하고 리는 그곳들을 매일 여행할 수 있다. 출퇴근 자체가 여행
있는 일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해진다. 가장 단순하게는 이 될 수 있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행
돈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인지부터 명확해진다. 그는 늘 해 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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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펙터클에 동참하는 것 프랑스 시농 성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여행을 할수록 우리는 더 겸허해진다. 여행지에서 우
에 앉아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詩碑)를 바라보곤 했다. 그
리는 대자연과 그 위에 구축해놓은 인간의 문명에 압도당 의 시, ‘저물 무렵’이 새겨진 시비이다. 앉아 있는 시간은
하곤 한다. 그 어마어마한 풍경들을 찬미하는 한편 자신 길어야 30분. 만사를 잊고 저 너머의 세계
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 를 힐끗 쳐다보는 30분은 일상에서 얻는
을 주눅 들게 하지 않고 삶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한다. 좋 30시간의 휴식보다 더 길고 편하다. 내가
은 의미의 ‘무력함’이다. 이를테면 450km에 이르는 대협 그리는 여행의 이미지는 걷기를 반복하는
곡에 펼쳐진 수백 개의 산들, 그랜드 캐년에 드리워진 석 여정 중에 얻는 깊은 휴식이다.
양을 보고 압도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할 말
을 잊는다.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은 일점도 안 되는 것이다.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 한조각
바다에 막대기를 세워 건설한 베네치아 왕국을 볼 때 자신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 올해는 이 절에
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절감한다. 우리는 더 겸 서 지낸다지만 다음 해는 어느 절 향해 떠나
허해지고 더 진지해지며, 이 세상이 끝없이 넓다는 사실을 갈꺼나 /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알게 되고, 살아보고 싶은 열정이 안으로부터 복받쳐 온 방 하도 고요해 / 진작에 이 세상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다. 지금 이곳에 태어난 ‘나’라는 존재야말로 우주의 행운 구름 사이 남아 있으리”
아임을 깨닫게 되고 이런저런 시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엄청난 것들을 여행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배 이처럼 여행은 우리를 깊은 휴식으로 인도한다.
울 수 있단 말인가. 여행은 자연과 문명의 위대한 스펙터
클에 동참하는 것이다. 떠나는 연습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 짐을 줄이는
최소한의 스케줄만으로 스스로 개척자가 되어
나의 여행원칙 중 하나는 최소한의 스케줄만을 갖는 것 것은 여행의 중요한 기술이다. 오랫동안 걷는 여행인 경우
가벼운 짐조차 버겁다. 낑낑대고 걷다가 결국 내려놓고 오
이다. 빡빡하고 완벽한 스케줄로는 미스터리를 기대할 수 기도 한다. 여행을 하면 내가 너무나 많은 짐, 무거운 짐을
없다. 대략적인 코스만 잡아 놓고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짊어지고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좀 더
돌아다닌다. 거리를 걸으면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카페에 가벼워질 수 있다. 가벼워져야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여행
앉아 차를 마시면서 거리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에 가면 뭐라 말할 수 없이 좋고 그대로 눌러 앉아 살고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기도 한다. 그밖에도 할 일이 많 싶은 곳도 있다. 하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떠야
겠지만 한정된 시간에 그걸 다 할 수가 없다. 사는 게 얼마 한다. 여행 자체가 인생을 닮았다. 짐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 바쁜데, 여행지에서조차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 그 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한다. 언젠가 우리는 아주 떠
리의 사람들, 낯선 풍경들, 건물들이 내게 뭔가 말을 건넨 날것이다. 지금 떠나는 여행은 최후를 스스럼없이 맞이할
다. 실은 낯선 풍경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친구들에게 여행을 권한다.
여행은 되도록 안내자 없이 스스로가 개척자가 되어 최소
한의 계획만을 가지고 가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다음 호부터는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주요 지역
을 도는 ‘스페인 3부작’을 연재할 예정이다.
깊은 휴식
일과 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엮는 휴대폰은 우리를
24시간 붙들어둔다. 숨을 곳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휴식
을 위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곤 한다. 어차피
여행지에서도 몸을 움직이게 되지만 일상에서 맛볼 수 없
는 진정한 휴식을 얻게 된다.
나는 설악산 봉정암에 올랐다가 용대리를 향해 몇 시간
걸어 내려가 저물 무렵에 백담사에 들러 마당 한쪽 땅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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