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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13 02:08:28

발행인칼럼_37

발행인칼럼_37

발행인 칼럼 37_ 스페인 기행① 론다

론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발행인 칼럼 37

스페인 기행 ① 론다

론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그동안 ‘회복의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36회에 걸쳐 칼럼 로마가 점령한 뒤 계속 가톨릭이 지배해왔던 이 땅에 8세
을 연재해왔다. 앞으로 1년간은 ‘스페인 기행’을 써나가려 기부터 무어인이라 불리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이 들어 왔
한다. 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이 나라는 우리와 전혀 다르 다. 그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의 주인공들이
기도 하지만 닮은 구석이 꽤 많아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었다. 그들은 800년 동안 이 땅의 주인으로 살면서 가톨릭
다. 한 달에 한 도시씩 찾아가 되도록 그곳의 역사를 들춰 과 유대인, 무슬림이 공존하는 문화를 꽃피웠다. 아직도 그
보려 한다. 그 도시들은 필경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뭔가 색깔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그것이 곧 스페인의 문화라고
일러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여행을 목적으로 스페인에 가
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지방을 찾는다.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사진 속으로 들어간다. 산간 고원 위에 거대한 암석이 우뚝
스페인 남쪽 끝 안달루시아. 대서양과 지중해 그리고 두 바 솟아 있고, 그 위에 도시가 있다. 안달루시아의 꽃이라 불
다를 잇는 지브롤터 해협에 닿아 있는 땅이다. 우리 머릿속 리는 ‘론다(Ronda)’이다. 인구 4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
에 들어 있는 스페인의 인상은 거의 이 지방에서 만들어졌 시다. 그러나 이 도시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론다를 사
다. 플라멩코, 하몽(스페인 햄), 오페라, 하얀 마을, 이글거 랑한 시인 릴케가 조각가 로댕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한 구
리는 태양과 그 아래서 즐기는 낮잠(시에스타) 그리고 무슨 절을 읽어보면 어떤 매력의 도시인지 감이 잡힌다. 그는 이
일이 있어도 오늘을 즐기고 내일 일은 내일 가서 보자는 느 렇게 썼다.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
긋한 태도까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에서 땅 거운 열기로 마을은 더 하얗게 된다.” 고도 723m의 거대 암
이 가장 기름지고 과달키비르강이라는 젖줄이 흘러 수천 석 위에 자리 잡은 요새 도시, 볼 것 많은 스페인에서도 가
년 전부터 도시들이 세워졌다. 수많은 민족들이 이 땅을 차 장 드라마틱한 풍경을 선사하는 곳, 론다로 가보자.
지하려고 전쟁을 벌였고, 여러 민족이 번갈아 지배했다. 당
연히 문화가 섞여 안달루시아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냈
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스페인의 이미지다.

150미터 협곡 위에 세워진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새 다리’라는 뜻이다. 협곡의 바닥에서부터 42년간 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다리에 서면 안달루시아 고원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소설은 영국 시인 존 런던의 기도문으로 시작된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나가면
저 다리의 사연을 읽기 위해 마드리드 북서쪽(60km) 도시 땅은 그만큼 작아진다오. … 누가 죽더라도 그것은 나 자신
세고비아로 잠시 가보자. 때는 1937년이다. 밤에 이곳 대성 이 죽는 것과 같다오. 나는 인류의 한 조각이기 때문에. 그
당의 종이 울릴 때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한 신부가 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마오. 종은 바로
그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저녁 종이 울리자 신부는 기 그대 자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므로.”
도를 바친다.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도대체, 도대체 누구 비단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
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 건가요?” 종이 울리면 내전을 일으 이 스페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킨 파시스트들이 성당 인근의 알카사르(스페인의 성)에 갇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소설가 시몬느 베이유와 조지 오웰
혀 있는 반대자들을 끌어내 한 사람씩 처형시키는 것이었 도 그 대열에 있었다. 파스시트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스
다. 3년(1936~1939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서 피비린내 나 페인 내전에 참전한 헤밍웨이는 그 반대편의 보복도 고발
는 내전이 벌어졌다. 온 국민이 두 쪽으로 갈려 서로에게 하고 있다. 누가 죽든 그것은 형제의 죽음이라고 외쳤던 것
총을 겨눴다. 파시스트들의 쿠데타로 시작된 내전은 보복 이다. 80년 전에 저 아름다운 다리에서 그 끔찍한 일이 벌
과 보복으로 이어졌다. 세고비아에서 파시스트의 반대자들 어졌다. 한 시대의 비극을 품은 다리는 스페인에서 가장 스
이 처형될 때, 이곳 론다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처형되었다. 펙타클한 장면을 연출하는 곳의 하나이며, 세계의 사진작
분노한 주민들이 파시스트에 가담한 자들을 끌어내 저 다 가들에게 사랑받는 명소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리로 끌고 가 150미터 협곡 아래로 내던졌다. 헤밍웨이의 다리에서 맞이하는 일출과 일몰의 장관은 평생 잊지 못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등장하는 이 장면들은 기억을 선물한다.
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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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 지방에는 무슬림들이 만든 하얀 마을(Pueblo Blancos)이 많이 남아 있다.
하얀집(카사 블랑카)은 옛 아랍 무어인들의 전통적인 집이다.

옛 무어인들의 하얀 마을 령하고 이어 스페인 북부 산간을 제외한 전역을 정복했다.
건축, 미술, 상업의 최고 기량을 지녔던 그들은 특히 안달
왼편은 신시가, 오른편은 구시가다. 1분이면 건널 수 있는 루시아에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론다도 그 하나이다. 나중
짧은 길이지만, 다리가 없었을 때는 협곡 아래로 내려가 다 에 가톨릭이 반격을 시작, 북부에서부터 국토를 재정복해
시 올라가야 했다. 그 불편을 없애려 1751년에 대공사에 착 나갔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780년이 걸렸고, 이 지방은 맨
수, 42년 만에 다리를 완공했다. 협곡의 밑바닥부터 돌을 나중에 회복되었다. 대공세 막바지에 가톨릭 군대는 론다
쌓아가며 아치형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 건너편은 온통 하 를 함락시키기 위해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험준한 지
얀 집들이다. 푸에블로 블랑코스(Pueblos Blancos), 즉 ‘하 형 때문이었다. 대신 협곡 아래에서 도시 위로 물을 끌어올
얀 마을’은 론다 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 곳곳에 즐비 리는 수로(水路)를 점령하고 물을 끊었다. 일주일 만에 성
하다. 저 유산을 남긴 사람들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 은 함락되었고 무슬림들은 쫓겨났다. 스페인의 가톨릭왕은
슬림인 무어인들이다. ‘하얀집(카사 블랑카)’은 옛 무어인들 큰 실수를 범했다. 공존하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모조리 쫓
의 전통적인 집이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대성 아내거나 죽여 도시를 떠받치던 엘리트들이 모두 사라졌
당도 이슬람 건축물이다. 무슬림들이 지은 모스크(사원)를 다. 문명을 이어갈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무슬림
성당으로 써왔다. 다시 말해 이 도시의 옛 주인이 북아프리 들이 이룬 도시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역설적으로
카에서 건너온 무슬림들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이 도시에, 그리고 스페인 전역에 무슬림
지배 시절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세계의 관광객들을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스페인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불러 모으고 있다.
다. 그들은 8세기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이 지방을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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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 국영 호텔 ‘파라도르 데 론다’ 축물들을 개조하여 국가가 영업하고 관리하는 호텔이다. 가
장 싼값으로 옛 귀족, 왕족들의 저택에서 잠을 잘 수 있기로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은 망조가 들 는 스페인의 파라도르가 유일할 것이다. 현재 전국에 94개
어 내리막길을 걷다가 내전(1936~1939) 3년 동안 완전히 주 의 파라도르가 있는데, 그중 절경으로는 론다의 파라도르를
저앉는다. 전국토가 전장이었고, 35만명이나 죽었다. 독재자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아래의 사진, 저 곳이다. 깎아지른 절
프랑코의 승리로 내전이 끝난 뒤에는 국제사회로부터 철저 벽 위에 서 있는 건물, 옛 시청사를 호텔로 개조했다. 옆에
히 고립되어 허덕이며 살았다. 남한 면적의 5배나 되는 광활 누에보 다리가 붙어 있고 창문을 열면 안달루시아의 고원이
한 땅에서 행해지는 농업과 아무 것도 손대지 않은 덕분에 펼쳐진다. 론다의 파라도르는 헤밍웨이의 호텔로도 유명하
그대로 남겨진 문화유산이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들은 여 다. 헤밍웨이는 론다에 올 때마다 이 호텔에서 묵었다. 호텔
기서 길을 찾았다. 내전의 참화 뒤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에는 그의 사인이 있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뒤편에 난
농사와 관광이었던 것이다. 어딜 가나 싸고, 음식 맛있고, 날 작은 길에는 ‘헤밍웨이 산책로’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는
씨 좋고, 경치 좋고, 수천 년의 문화유산들로 가득한 스페인 협곡 아래로 내려가 산책하면서 대작들을 구상했다고 한다.
은 유럽의 휴양지였다. 그들은 동쪽 해변부터 시작해 국토 파라도르 객실 발코니에서 안달루시아 고원의 기분 좋은 바
전체에 호텔을 짓고, 관광산업을 일으켰다. 람을 맞으며 광활한 대지에 뜨고 지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
‘파라도르(Parador)’라는 이름의 국영호텔도 만들었다. 스페 다. 겨울밤에는 귀청을 찢을 듯 윙윙거리며 협곡으로 들어
인어로 ‘휴식처’를 뜻하는 파라도르는 스페인 전역에 산재한 오는 기막힌 바람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궁전, 고성, 수도원, 요새, 귀족의 대저택, 관청 등 역사적 건

옛 왕족, 귀족의 대저택, 성, 관청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개조해 ‘파라도르’라는 호텔로 만들어 국가가 영업하고 관리해왔다.
현재 94개의 파라도르가 있다. 사진은 협곡 위에 세워진 론다 파라도르.

투우 발상지 론다에 세워진 스페인 최초의 투우
장(Plaza de Toros). 이곳 사람 프란시스코 로메오
는 칼과 붉은 망토를 든 마타도르가 소와 싸우는
근대 투우를 창안했다.

론다 신시가의 타호 공원에 있는 조망대에 서
면 안달루시아 고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성벽
에 달린 발코니가 조망대다.

피할 길 없는 운명과의 대결, 투우 소들은 정신이 나간 채 햇살 가득한 경기장으로 나오고, 투
우사가 흔드는 붉은 색 천을 보는 순간 흥분하여 그대로 돌
투우(鬪牛). 소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소와 인간이 싸우 진한다. 투우사들은 돌진해오는 소에 여러 발의 창을 꽂고,
는 경기다. 론다는 그 투우의 발상지로, 왼쪽(위) 사진이 스 마타도르가 정수리에 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숨통을 끊
페인 최초의 투우장이다. 동물학대로 지탄받고 경기침체 는다. 그러나 항상 소가 완벽하게 제압되는 것은 아니다.
까지 겹쳐 투우가 쇠락하고 있는데, 지금도 저곳에서는 투 흥분한 소는 관중석으로 올라가 관중들을 들이받는 경우
우가 열린다. 투우도 아랍인들이 남긴 문화다. 북아프리카 도 더러 있다. 유투브에 들어가면 그 영상들을 볼 수 있다.
의 무슬림들이 들어와 스페인과 포르투칼에 투우를 전했다 투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영상에 이런 댓글을 붙인다. “소
고 한다. 17세기까지는 귀족들의 오락으로 행해지다가 18세 여, 관중들을 들이 받으라!” 그러나 투우 애호가들은 쏟아
기부터 군중들 앞에서 벌이는 경기가 되었다. 이 근대 투우 지는 비난에 이렇게 대꾸한다. “비참하게 길러져 도륙되는
의 개척자가 이 도시 사람 프란시스코 로메오인데, 그는 일 소와 평생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 끝에 장엄하게 죽는 투우
생 동안 6천 마리의 소를 죽였다고 한다. 투우장 내 박물관 소 중 누가 더 행복한가?” 옹호자들에게 투우의 의미는 절
에 가면 그를 비롯해 초기 개척자들의 유품들을 볼 수 있 대적이다. 투우는 피할 길 없는 운명 앞에 내던져진 인간이
다. 투우는 ‘마타도르(matador)’라고 불리는 주역과 여러 투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그 운명에 대적하는 것을 보여주는
우사들이 한 조가 되어 광기에 빠진 들소들과 대적하는 경 장엄한 의식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기다. 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잘 길러진 들소들은 투우에 나
가기 전 마지막 날 빛이 완전히 차단된 방에 가두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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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의 옛 주인은 아랍 무어인. 아직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la Mayor). 이곳은 본래 무슬림
바노스 아라베스(Banos Arabes), 아랍 목욕탕이다. 이 도시에 들어가려면 사원(모스크)이었다. 무슬림을 축출한 뒤 그대로 성당으로 사용
관습에 따라 목욕을 해야 했다고 한다. 했다. 한때 지진으로 훼손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옛 이슬람 시절의 론다를 보여주는 아랍 성벽. 방문자들은 이 성을 지나 절
벽 위의 도시 론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무어왕들의 집(La Casa del Rey Moro). 이름과 달리 이 집은 1700년대에 2014년 2월, 론다 신도시의 다운타운 정경.
지어진 것으로 아랍인들이 살지 않았다. 이 집에는 아래의 강으로 연결되
는 계단이 있는데, 그것은 이슬람 시절에 물을 끌어 올리는 송수관으로 사
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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