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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01 22:01:31

발행인칼럼_48

발행인칼럼_48

발행인 칼럼 48

‘방랑자’ 크눌프와
헤르만 헤세

발행인 칼럼 48

‘방랑자’ 크눌프와
헤르만 헤세

헤세의 고향 ‘칼프’, ‘마울브론’ 수도원을 찾아

_박경욱(제이미파커스 대표)

니콜라우스 다리 위의 노인 헤세의 도시 ‘칼프’
초입에 서 있는
반듯하게 갖춰 입고 뭔가 궁금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저
노인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이 동상 간판. 간판 제목은
은 그가 태어난 곳, 독일 남부의 ‘칼프(Calw)’에 있다. 우리는 ‘칼프의 어린이
보통 헤세를 독일 작가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가이드’. 2010년
는 독일 출신의 스위스 작가이다. 마흔 두 살에 스위스 남부의 사진이다.
몬타뇰라(Montagnola)로 이주해 스위스 국적으로 살았고, 그
곳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 칼프에서 산 것은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의 몇 년에 불과하다. 그러면 마땅히 소
년 헤세의 동상이 있어야 할 텐데, 왜 만년(晩年)의 모습인가.
헤세는 죽는 날까지 고향을 잊지 못하고, 늘 고향을 그리며,
고향 사람으로 살았다. 아마도 저 모습은 고향을 찾아와 두리
번거리는 노인 헤세일 것이다.

헤세의 삶은 방랑의 연속이었다. 19세기 사람들은 대부분 자
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었을 것이지만 헤세는 스위스
몬타뇰라에 정착하기까지 도시를 무려 15번 가량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중 1년 이상 살았던 도시가 10개나 된다. 당시로선
아주 희귀한 케이스다.

칼프 시내를 흐르는 나골트(Nagold) 강.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작은 강이다. 만년(晩年)의
헤세는 어렸을 때 낚시도 하면서 이 강가에서 놀았다. <크눌프>를 비롯한 그의 헤세 모습을 담은
여러 작품들 속에 강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이 동상은
그는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정적, 정신적, 정치적으로도 칼프 시내 나골트
방랑의 삶을 살았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고, 때론 부인과 자식 강 위에 세워진
들을 두고 홀로 도주(이사)해 살기도 했다. 신학교에 들어 갔다 ‘니콜라우스 다리’에
가 도망쳤고, 이 학교 저 학교 자주 옮겨 다니다가 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어려서 정신병원에 붙잡혀 갔고, 자살 서 있다.
을 시도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어 전
문적인 정신분석을 받았다. 전쟁 때는 독일에서 매국노 취급
을 받아 들어가지도 못했고, 책 한권 낼 수도 없었다.

이렇듯 그의 삶은 방랑 그 자체였다. 그의 작품들도 방랑으로
가득하다. <크눌프>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
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방랑자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들
이 쏙쏙 잘 읽히는 것은 주인공들에 대한 묘사가 자신의 방랑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방랑자들 중
에서도 헤세가 가장 아끼고, 그의 진정한 분신이라 할 만한 주
인공이 있으니, 그는 동명 소설의 주인공 ‘크눌프(Knulp)’다. 크
눌프는 헤세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그 이야기는 헤세가 어린
시절 놀았던 칼프의 강가와 숲속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칼프 시내의 헤세 박물관.

칼프 중심부
마르크트 광장

일대

칼프 시내 중심지인 마르크트 광장 주변. 헤세의 생가가 있다. 헤르만 헤세 광장에서(2010년)
헤세가 태어난 1877년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칼프 시내 일대. 구시가 중심부는 독일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주택들로 가득하다.

칼프 시내 방랑자 크눌프
마르크트 다리
건너 은행건물 앞에 크눌프(Knulp). 그는 시인이며 노래도 곧잘 부른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린이
서 있는 ‘방랑자 처럼 티 없이 맑다.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하다. 그가 어떤 곳에 머물면 주위가
크눌프’ 동상.
조각가 칠리 환해진다.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이다. 어떤 사
(Friedhelm Zilly)의 심도 없이 사람들과 관계한다. 누군가 좌절해있으면 위로하고 일으
작품으로, 2010년에 켜 세워준다. 슬픔에 빠졌거나 우울한 사람도 그를 만나면 마음이
밝아져 속을 털어 놓게 된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다. 그
세워졌다. 런데 크눌프는 직업이 없고 집도 없다. 얼마든지 돈도 벌고 결
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지만 다 마다하고 정처 없이 떠돈다.
이런 독특한 인물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편으
론 그를 반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기조차 한다.

그의 고향은 게르버자우(Gerbersau). 이것은 소설 속의 이름이고
실제 지명은 칼프(Calw)다.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검은숲) 지방의
북쪽에 자리한,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마을이다. 크눌프

는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났다. 정해진 목적지가 따로 없고, 돌아
갈 곳도 없으니 방랑이다. 그는 자기의 계획이 아니라 ‘바람의 의
지’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도시와 자연을 구경하
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 외에 삶에 대해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떠돌다가도 기이한 불안
과 향수에 사로잡히면 고향이 있는 독일 남부를 향하곤 했다.
왜 그가 고향을 떠났으며, 방랑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늘 좋은 사람,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쓸모없는’
사람인 줄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라인강이 흐르는 스위스 바젤(Basel) 구시가 일대. 헤세는 네 살 때 바젤로 이사와 5년간 살았다. 그는 라인강가의 바젤도
고향의 하나로 여겼다. 스물 두 살 때 다시 바젤로 와서 ‘라이히’ 서점에 취직해 점원으로 일하면서 글을 썼다.

마울브론(Maulbronne) 수도원 헤세의 고향 칼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울브론 수도원 안에 유서 깊은 명문 신학교가 있다.
헤세는 열네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6개월도 안 돼 도망쳤다.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등의
소설에 이곳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위 사진은 신학교의 모습, 수도원 전경은 95페이지에 실었다.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던 사람 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었다. 그는 살면서 어떤 소원도
품어본 적이 없다. 이제 마지막 하나의 소원이 있었으니, 고
열네 살 때 크눌프는 연상의 프란체스 향에 돌아가 눈을 감는 것이었다.
카를 만나 끔찍한 사랑에 빠졌다. 그에 어찌어찌 힘겹게 고향에 들어온 그는 산 속에서 작업하던
게 프란체스카는 성모 마리아였다. 그 샤이블레라는 이름의 인부를 만난다. 그는 어렸을 때 친구
였다. 평생 일하며 살았지만 재산을 불리지 못했고, 지금도
러나 상대는 진지하지 않았다. 하루 하루하루 고된 일로 살아가는 옛 친구의 한탄을 들었다. 크
는 숲을 배회하다가 벤치에서 밀회 눌프는 친구를 이렇게 위로했다. “만약 우리가 죽어서 하늘
를 즐기는 남녀 한 쌍을 발견했다. 로 간다면 신께서 ‘너는 왜 판사가 되지 않았느냐?’면서 호
프란체스카와 어떤 청년 직공이었다. 남자 통을 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그 분은 ‘이 귀여운 어
의 한손엔 담배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손은 그녀의 가슴 린이가 왔구나’하면서 받아주실 거야.” 친구에 대한 위로였
속에 있었다. 마음에 성모를 품었는데, 창녀를 만난 격이랄 고,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기도 했다.
까.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지 사실 프란체스카에
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날로 이 순진한 친구는 집도 버리 정말 우리는 판사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야 하는 걸까?
고 방랑길에 올랐다. 뭐가 된들 어떠하리. 크눌프는 그 어떤 것도 되어보고자 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산 행운아
크눌프는 세상을 떠돌며 젊은 시절들을 소비했다. 여자든 였다. 신은 성공한 판사나 사업가보다 그렇게 인생을 즐긴
남자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 사람을 더 반기지 않을까?
지 않았다. 좋은 천성대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해
주고 또 즐기면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렇게 거의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는 돌아다니다가 폐결핵을 얻었다. 당시

자기 인생과의 화해 을 뿐이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방랑했고, 안주해서 사
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주었다. 너는 나를
고향에 돌아온 크눌프는 죽기 전에 프란체스카를 보고 대신하여 어리석은 일을 하고 조롱을 받았고, 사랑을 받
싶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 기도 했다. 네 안에서 내가 조롱을 받고, 네 안에서 내가
다. 큰 눈이 내린 어느 날, 크눌프는 고향의 숲속을 미친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의 자녀요 나의 형
듯이 돌아다녔다. 과연 나의 삶은 온전한 것이었는가? 제며 나의 일부이다.” 이것은 신의 이름을 빌어 헤세가
의문을 품은 채 눈 속에서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 그 앞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에 신이 나타났다.
신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이상 한탄할 것이 없는가?
크눌프는 고백했다. “저는 쓸모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는가?” 크눌프는 미소를 지으며 모든
신은 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대답했다. “크눌 것이 잘 되었다고 답했다. 크눌프가 눈 속에 누운 채 눈
프. 너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준 일이 없고, 그들은 너를 을 떴을 때 해가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이 너무나
원망하지 않는다. 이 어린이 같은 친구야. 너는 얼마나 강렬해서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자기 몸에 눈이
재밌게 살았던가. 네가 방랑자가 된 것은 여기저기서 사 너무 무겁게 쌓이는 것을 느끼고 털어내려고 했지만, 잠
람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직도 모 들고 싶은 의지가 다른 어떤 의지보다도 강렬해졌다. 크
르느냐?” 크눌프는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날 눌프는 그렇게 스러져갔다.
들이었다. 환희도 비애도 다 아름다워 보였다. 신은 말
을 이었다. “나는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

삶이 저물어갈 무렵의 헤세. 그는 몬타뇰라에 살면서 수많은 튀빙겐의 헤켄하우어(Heckenhauer) 서점. 18세 때
독자편지에 답장을 했다. 한국 전혜린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곳 점원으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 작가로 데뷔했다.

마르크트 거리에 있는 헤세 생가

칼프 시내에 헤세가
삶을 마친 도시의
이름을 단 카페가 있다.
카페 몬타뇰라.

니콜라우스 다리 위의 헤세 동상. 다리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은
1400 년 경에 세워진 니콜라우스 예배당.

헤세와 크눌프의 도시, 칼프 도시는 헤세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헤세가 낚
시를 하면서 놀았던 나골트 강 위의 니콜라우
독일 남부에 ‘슈바르츠발트’라는 지방이 있다. 스 다리에는 할아버지 헤세의 동상이 서 있
‘검은숲’이라는 뜻이다. 숲이 빽빽해 햇빛이 다. 길 한 켠 은행 앞에 또 한 사람이 우두커
잘 들지 않을 정도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 니 서 있다. 방랑자 크눌프의 동상이다. 조각
었다. 모든 산들을 가로지르는 산간도로가 나 가 칠리(Friedhelm Zilly)의 작품으로, 2010년
있고, 3천여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삼림욕 에 세워졌다.
의 발상지가 바로 이 지방이다. 검은숲 사이사
이에 그냥 지나치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소도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나의 고향
시들이 수없이 깔려 있다. 그 북쪽에 헤세의 을 찾았을 때 거리 곳곳에서 살아 있다고 느
고향 칼프가 있다. 낀 것은 부모님의 모습이 아니라 크눌프였다.
크눌프와 고향이 하나였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깨달았다.”
‘검은숲’에 안긴 이 도시를 찾아가는 길은 어 헤세가 태어나 잠깐 살았던 목조주택 이층은 헤세의 생가로
느 쪽에서도 아름답다. 구불구불한 고원도로를 달리다 산과 보존되어 있다. 마르크트 거리의 끝자락엔 헤세 박물관이
산 사이에 함몰된 듯한 작은 분지로 들어서면 ‘헤르만 헤세 있다. 헤세 박물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다. 이곳 헤세의 고
의 도시, 칼프’라고 써진 정겨운 간판이 반겨준다. 유년시절 향 칼프, 처음 결혼해서 살았던 보덴 호숫가의 가이엔호펜,
을 잠깐 살았을 뿐이지만 칼프는 헤세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리고 헤세가 후반생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스위스 몬타뇰
그는 많은 시와 소설, 수채화 속에 고향을 등장시켰다. “내 라. 세 곳 모두 아담하고 정겨운 건물들이다. 세계 각지에서
가 시인으로서 숲이나 강, 초원, 밤나무 그늘 혹은 전나무 향 방문객들이 찾아오지만 붐비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칼프 주변의 숲과 나골트 강을 생
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 깔렸던 곳 … 마울브론 신학교 프가 바로 이것이다. 마울브론 신학교 시절의 체험은 헤세
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
헤세의 고향 칼프에서 하이델베르크 방향으로 53km 떨어진 알 유희> 등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곳에 ‘마울브론(Maulbronne)’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헤세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헤세는 고향의 시계공장에서 있다가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 이름난 수도원 에슬링겐, 튀빙겐, 바젤 등 큰 도시의 서점에 취직해 일하면
이 있다. 천문학자 케플러, 시인 휠덜린이 다닌 명문 신학교 서 글을 쓰기 시작해, 작가로 데뷔한다. 그가 마울브론 신
이기도 하다. 그 형태가 온전히 보존된 문화박물관으로, 누 학교를 뛰쳐나간 것은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
구나 가면 깜짝 놀랄만한 곳이다. 헤세는 열네 살 때 이곳 지 않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마침내 그는 자기 내면이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의 수업과 규율은 혹독했다. 헤세 인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고향 칼프와 마울
에게 그곳은 감옥이었다. 그는 숨 막히는 생활을 견디지 못 브론 신학교, 정신병동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멋진 작품
해 도망쳤다가 붙잡혀 8시간 감금당하는 처벌을 받았고, 결 들을 쏟아냈고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국 6개월도 안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우울증에서 벗어 해서 그의 방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 호에서는 헤세의
나지 못해 정신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7살 후반생을 따라 스위스 남부 테신(티치노) 지방의 몬타뇰라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했다가 실패하자 권총자살을 시도했 (Montagnola)로 간다.
다. 헤세는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소설 <크눌프>
에서 주인공이 프란체스카에게 버림받고 방랑을 떠난 모티

전문 가이드나 교사의 안내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도원 입구의 서점. 헤세의 작품들과 수도원 안내 책자들을 구할 수 있다.

마울브론(Maulbronne) 수도원(개신교) 일대. 헤세가 다녔던 신학교가(점원 부분)
수도원 안에 있다. 수도원은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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