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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20 23:25:57

발행인칼럼_34

발행인칼럼_34

발행인 칼럼 34

회춘묘약 블루진

사진 |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한 장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야전셔츠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으로,
낡은 트럭을 몰고 낯선 여인 메릴 스트립의 집 앞에 나타났다. 이틀 뒤 두 사람은 이런 사이가 되었다.

회복의 심리학 34

회춘묘약 블루진

입던 옷 버리고 청바지로 갈아타는 날, 그는 노인의 세계에서
추방당해 비로소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명백한 불륜이 아름다운 로맨스가 되었다. 01. 다짜고짜 불꽃 튀는 연애 속으로
청바지가 한몫했다.
“하얀 나방들이 날개짓할 때, 저녁식사를 하고 싶으면 오늘
밤 일 끝나고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처음 만난 매혹의
중년 여인으로부터 이런 쪽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결혼생활 15년 차,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중년 부인 프란체스
카는 예이츠(W.B. Yeats)의 시를 즐겨 암송하곤 했다. 부인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예이츠의 시 한 구절 ‘하얀 나
방들이 날개짓할 때’를 인용해 깊은 암시의 쪽지를 써서, 그
남자와 만났던 다리에 붙여놓았다. 이런 초대에 응하지 않는
다면 그 또한 예의가 아니겠지. 사진 작가 로버트는 그날 밤
한적한 시골 마을 프란체스카의 집을 찾아간다. 그 저녁에,
남편이 부재중인 여자의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 상상
할 수 있을까. 일생에 한번이나 찾아올 법한 짧고 격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 그런가 하면 명
백한 불륜을 아름다운 로맨스로 미화했다고 눈총받기도 하
는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그렇게 시작한다.

야전셔츠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낡
은 트럭을 몰고 원피스에 맨발인 채로 차를 마시던 메릴 스
트립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는 반드시 청바지를 입고 등장해
야 했다. 말쑥한 정장차림이었다면 그 로맨스는 성립될 수 없
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청바지는 야전셔츠, 낡은 트럭, 니
콘 카메라, 야생화, 원피스 차림의 맨발, 예이츠의 시들과 어
우러져 다짜고자 불꽃 튀는 연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년
남자에게 청바지는 아직 연애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젊
고, 또 얼마든지 그럴 의사가 있다는 ‘코드’로 읽힌다. 청바지
입고 하는 연애는 로맨스로 보이는데, 정장차림의 연애는 불
륜으로 인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청바지에는, 그걸 입는 사
람의 나이와 관계없이 ‘아직 젊다’는 신호가 박혀 있다. 사람
들은 젊은 그의 외출을 허락해주고 싶은 것일까?

02. 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 세계 최고령 청바지 미국 네바다 주의 탄광에서 발
견된 현존하는 최고령 청바지(1880년 생산). 경매에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어. 난 유태인일 뿐이야.” 1846 나와 약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일명 ‘네바다 진’으
년, 독일 밤베르크 근처에 살던 룁 스트라우스라는 청년은 여 로 불리며, 복각판도 출시되어 고가에 판매되었다.
자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놓고 뉴욕행 증기선에 몸을 실 최초의 청바지는 그보다 7년 앞선 1873년에 ‘웨이스
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그의 독일 이름 ‘룁’을 발음하지 트 오버롤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못해 ‘리바이’로 읽었다. 미국에서 살려면 차라리 ‘리바이’가
낫겠다 싶어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리바이는 뉴욕에 먼저 건
너온 두 형들과 함께 장사를 하다가 독립하고 싶어 물건을
싸들고 캘리포니아로 갔다. 그때 본격적인 골드 러쉬가 시작
되어 미 서부 곳곳에 금광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리바이는 이탈리아 항구도시 제노아에서 생산된 마차 덮개
용 직물을 팔았다. 미국 사람들이 ‘진(Jean)’이라고 부른 질긴
천이 잘 팔려 돈을 꽤 벌었다. 그러나 그의 천은 비를 막진
못했다. 어느 날 잭이라는 광부가 “그 천이 비가 줄줄 샌다.”
며 따지러 왔다. 리바이는 해질 대로 해진 작업복 바지를 입
고 있던 광부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럼 그 천으로
아주 튼튼한 바지를 하나 만들어드리죠.”

그 작업복 바지가 질기다고 소문이 나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
지자 리바이는 아예 업을 바꾸었다. 세계 최초의 청바지 ‘웨
이스트 오버롤스(Waist Overalls)’와 최초의 청바지 회사 리바
이스(Levi's)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
을 개척하라” 서부 개척기의 프론티어 정신으로 대박을 터
뜨린 것이다. 한 세기를 건너 뛰어 1950년대에 말론 브란
도, 제임스 딘 등 2차 대전 직후의 ‘분노하는 젊은이들(angry
young man)’을 대변하던 배우들이 막장 광부들의 작업복을
입고 영화 속에 등장하자, 순식간에 세계 청년들이 따라 입었
다. 우리나라에도 1950년대에 청바지가 들어왔고, 1970년대
부터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했다. 그 주역들이 지금의 60~70
대이다. 탄생하는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청바지는 그 속에 엄
청난 에너지를 내장해, ‘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이라는
프론티어 정신과 청년정신, 저항정신의 드레스 코드가 되어
왔다.

03. 블루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다

1989년 철거되기 시작한 베를린 장벽에 올라간 청년들의 “바르샤바·프라하·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 등의 도시
모습이다. 전원 청바지 차림이다. 장벽을 무너뜨린 청년 에서는 베오그라드나 동베를린의 거리에서처럼 블루진
들은 지금 50대가 되었다. 저 장벽 너머 철의 장막에 갇 차림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 소련에서 청바
혀 있던 사람들은 원래 이런 자본주의 풍의 바지를 입을 지 차림의 록그룹이 생긴 것은 이미 오래된 얘기며….”
수 없었다. 1980년대에 개방 바람이 불면서 서쪽의 청바
지가 들어가 하나둘 입혀지기 시작했다. 청바지를 입은 이렇게 청바지의 세례를 받은 동베를린 청년들은 1987년
그들은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졌다. 삼삼오오 모여 6월 서베를린에서 열렸던 록그룹 ‘제네시스’의 공연 소리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자기들이 살고 가 잘 들리지 않자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라”고 시위를
있는 체제에 대해 “이게 아닌데…”하고 고개를 젓기 시작 벌이기도 했다. 결국 그 청년들에 의해 2년 뒤에 베를린
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장벽 너머의 모든 나라가 흔들렸 장벽은 무너졌고, 그 너머의 체제도 사라지고 말았다. 자
다. 동유럽이 해체되기 직전인 1987년 9월 12일자 중앙일 본주의의 종주국에서 태어난 청바지는 이렇게 자본주의
보 기사를 보자. ‘블루진에 펑크족 물결 넘실’이라는 제목 와 민주주의를 지구촌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청바지에는
을 단 기사에서 특파원은 동유럽 젊은이들이 청바지를 입 ‘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이라는 유전자가 배어 있는
고 록 음악을 들으며, 자기 체제를 흔들고 있다는 소식을 것이다.
전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에 올라탄 동독의 블루진 청년들. 블루진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실어 날랐다.

04. 블루진,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낸다 포크의 전설, 존 바에즈(Joan Baez)의 20대와
74세(2015년)의 모습. 그는 여전히 청바지 차림에
나이 60 넘은 사람이 양복 매끈하게 빼입고 머리에 기름 발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라 뒤로 넘기고 어깨에 적당히 힘주고 느릿한 걸음으로 집
을 나선다. 혹은 두루마기 한복을 걸치고 외출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사람이 허술하지 않고 좀 있어 보이면 “할아버님” “어르신”
정도의 호칭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장셔츠나 면티에 청
바지를 입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 입에서 그리 쉽게
“할아버지” 소리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어떻게 불러야 좋을
지 망설일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불러주는 대로 살고, 그
렇게 늙어간다. 애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가, 애들 훈계하는
어른이 되고 싶은가.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가, 좀 더 놀다
가고 싶은가. 권위를 원하는가, 젊음을 원하는가. 우리의 드
레스 코드는 거기서 정해진다.

자녀가 결혼해 손주를 보게 되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가
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할아버지’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
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어느덧 주위의 대접
에 걸맞는 차림새와 매너가 몸에 밴다. ‘할아버지’라는 소
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무렵, 우리는 거울 앞에서 느
닷없이 나타난 한 ‘늙은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를 ‘늙은이’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많이 생긴다. 눈 깜짝
할 새 그 무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무
방비인 채로 스스로를 늙은이의 세계로 유폐시켜왔다. 이
제 그 늪에서 빠져 나가야 한다. 알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오
려는 자, 알을 깨야만 한다.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려는
자,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 에
너지가 가장 뜨겁게 분출했던 시절을 상기해보라. 그때 어
떤 옷을 입었던가. 미친 척 청바지로 갈아입자. 친구들로부
터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환영이다. 어차피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노인의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자,
비로소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것이다.

청바지가 만든 풍경들 속으로…

백포켓에 무엇을 넣을 지는 넣는 사람 맘
2010년 12월 로마, 빗길을 걷는 커플. 본래 청바지의 백
포켓은 캘리포니아 광부들이 공구를 넣을 수 있도록
큼지막하게 만들었고, 가장자리에 리벳을 박아 뜯어지
지 않게 했다. 포켓에 리벳을 박는 전통은 여전하다. 저
남자는 여자의 공구 포켓에 자기 손을 찔러 넣었다. 무
엇을 넣을지는 그 사람 맘이다. 단, 모르는 사람 포켓에
는 절대 손을 넣지 말 것. 자기 포켓에도 지갑은 넣지
말 것. 요즘 청바지는 백포켓이 깊지 않다.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홍콩 ‘반산(半山)’의 계단
식 거리. 사람들이 카페 앞 계단에 줄지어 앉
아 늦은 오후를 즐기고 있다. 청바지를 입으
면 노는 물이 달라진다. 어떤 곳도 갈 수 있
고, 점잔 뺄 일 없이 아무 데나 앉을 수 있다.

가족을 소통시키는 블루진
2009년 8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보행자 전용 거리의
풍경. 일가족을 포함,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예외 없이
청바지 차림이다. 그들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
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훨씬 더 많이 대
화한다. 부모와 자식이 거의 같은 옷을 입고 산다. 드레
스 코드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이 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

“청바지에 면티가 정답이다” _조지오 아르마니
남성복 디자인의 최고 거장 조지오 아르마니(81세)는 2005년
한국을 방문, “당신이 추구하는 패션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동
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인간이 옷에 속박
돼서는 안 된다. 옷 안에서 몸이 편안히 움직이고 그 옷을 통
해 인체가 더욱 자연스러워 보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바
지에 하얀색 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청바지를 입기로 결심하면
2010년 10월, 로마를 여행 중인 노부부. 우리가 저
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할 때 사람들이 선뜻 할아
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60대, 70대의 어떤 남
자가 입던 옷 버리고 청바지로 갈아입기로 결심한
다면, 그의 인생에서 그날은 프랑스대혁명이나 갑
오경장에 견줄 수 있다. 그는 노인의 세계에서 추
방당해 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청바지, 한국과 일본만 예외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쇼핑가. 수많
은 인파 중 청바지를 입지 않은 사
람을 찾기가 힘들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서 시작된 청바지는 2차 대
전 전후로 미국을 완전히 휩쓸고,
유럽으로 건너가 순식간에 점령했
다. 선진적인 모든 나라에서는 청바
지가 일상복의 중심이다. 예외가 있
다면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이다.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Esquire> 미국판의 패션 디렉터 닉 설리반은 이렇게 말
했다. “바지를 배꼽까지 끌어 당겨 입는 남자는 살인자
들(murderers)밖에는 없다” 실제 살인자들이 ‘배바지’를
입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바지가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옛날에 깡패들은 대부분 배바지를 입었
다. 양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회음부에 닿을 때까지 바지
를 쭉 끌어올려 입으면 배바지가 된다. 청바지는 그 반
대로 입어야 한다. 청바지의 벨트라인이 골반 끝에 걸치
도록 끌어내리면 된다. 사진은 2010년 5월 서울 인사동.

“죽기 전에 청바지 한번 입고 싶다”

2009년 9월, 천호식품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그만 두고 기업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사업차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을 마치고 요세미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느 벌판에 차를 세우고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오랫동안 벼르던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
에 사로잡혔다. 그때 머릿속에서 “죽기 전에 청바지 한
번 입고 싶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나는 그 순간을 지금
도 잊지 못한다. 수첩에 메모해두고 1년 계획으로 준비
해 마침내 2011년 3월에 중년 청바지 5종을 내놓았고,
그 문구 그대로 광고를 내보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후 꾸준히 중년 청바지 시리즈를 발매해 지금 23종이 되
었고,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해 개발제품이 300종을 넘
었다.

사진 | 이달 초 본사 2층 발코니에서 필자. 레드와인 컬
러의 피케셔츠에 청바지, 집업 구두 차림이다. 청바지는
2011년 4월 발매한 ‘썸씽블루’ 모델로, 4년 넘게 즐겨 입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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