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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13 01:41:08

발행인칼럼_39

발행인칼럼_39

발행인 칼럼 39_ 스페인 기행③ 세비야 (Sevilla)

예수는 왜
세비야에 재림했는가?

발행인 칼럼_ 39

스페인 기행 ③ 세비야 (Sevilla)

예수는 왜 세비야에 재림했는가?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100명이 산채로 불태워진 다음날 예수가 나타나다

예수가 죽은 지 1500년 만에 스페인 남 500년 전 세비야에서는 나찌의 만행을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부도시 ‘세비야(Sevilla)’에 재림했다. 푹푹 뛰어넘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공공연히 위하여’ 100명이 산채로 불태워진 다음날
찌는 여름날 장엄한 대성당 앞으로 내려 저질러졌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이었다. 구원을 갈망하는 외침이 하늘에
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 대리인들에 의해, 그 이름을 내건 성스러 전해졌고, 예수는 잠깐이라도 가여운 형
프 형제들’ 속에서의 재림이지만 충분히 운 장소에서 범죄가 행해졌다. 도스토예 제들을 만나고 싶어 장작더미가 불타오르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 프스키는 당시의 세비야를 다음과 같이 던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프스키의 마지막 업적으로, 인류역사상 묘사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루 성당 중에서도 장엄함과 아름다움에서 첫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가 멀다 하고 장작더미가 불타올랐고 웅 손가락에 꼽히는 세비야 대성당을 비롯해
예수가 재림하는 제2부 5편의 ‘대심문관’ 장한 화형대 위에서는 사악한 이단자들 오늘날 세비야에서 만나는 중세의 건축물
은 백미다. 프로이트는 “소설 속 대심문 이 불태워졌다.” 들과 거리들은 500년 전의 잔혹한 범죄와
관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이른바 ‘종교재판
고도 했다. 왜 그때 예수는 세비야에 나 이것은 사실이다. 소설에서 예수가 재림 (이단심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당시 스페
타나야만 했을까? 한 것은 세비야의 모든 가톨릭 성직자와 인에서는 ‘성스러운 심판’이라고 불렀다.

세비야 대성당(Catedral) 무슬림을 축출한 뒤 이슬람 대성전을 허물고 지었다. 1402년에 “사람들이 우릴 미쳤다고 할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자”며 시작해 1506년에 완공했다. 고딕양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사진은 대성당의 일부다.

과달키비르 강변 ‘황금탑’ 13세기 초 무슬림 왕조 때 지은
선박 감시탑. 이 탑과 강 건너편에 쇠사슬을 걸어 선박 통행
을 통제했다. 당시에는 탑의 꼭대기에 금빛 도자기를 얹어
빛났기에 황금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악한 이단자’들의 소굴로 지목된 세비야

종교재판은 공식교리에 어긋나는 믿음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 당연히 거 로 이단 색출에 들어간다. 심지어 돼지고
을 가진 가톨릭 내부자들을 박멸하기 위 짓 개종한 자들이 많을 것이라 여겼다. 기를 먹지 않거나 기도 전에 손을 씻지
해 12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어 유 도미니크 수도회의 한 수도사가 이들을 않거나 안식일에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럽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그 화 가려내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자고 이단으로 간주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살이 유대인, 무슬림, 개신교도들을 향했 아이디어를 냈고 교황은 ‘신실한 신앙심
다. 모두 미친 짓이었지만 특히 스페인 에서 우러나온 청원’을 받아들였다. 1478 감옥에 가면 누구나 고문을 받았고,
종교재판은 교황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년 세비야에 종교재판소가 설치되고 추 고문 중 자백하면 재산몰수, 토굴감금,
로 악명이 높았다. 그 최초이자 극렬 현 기경이 대심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교수형 등 일종의 ‘선처ʼ가 베풀어졌지
장이 세비야였다. 만,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 완고한 이단
‘그럴 것이다’는 심증만으로도 심문은 으로 간주되면 화형대에서 산 채로 불
스페인의 가톨릭 왕국들은 무슬림으로 개시되었고, 자백 없이도 두 사람만 증언 태워졌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말할 것
부터 국토를 회복하자마자 유대인과 무 하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단 색출을 도 없고 나중에는 개신교도들이 표적이
슬림을 쫓아냈다. 그들은 가톨릭으로 개 위해 고문과 밀고가 적극 권장되었다. 도 되었으며, 사적인 원한이나 경쟁관계에
종하거나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 미니크 수도회는 고문방법들을 직접 개 있는 사람들도 밀고 되어 목숨을 잃었
해야 했다. 가톨릭 왕국들은 추방과 개종 발했는데, 너무도 잔혹하여 고문을 가하 다. 1478년에 시작된 이 광기는 스페인
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고, 사람들의 머 면 자백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우선 이 지배하던 남미로도 수출되었고 1834
릿속 생각까지 모두 파헤쳐 온 국토를 순 심문관이 성직자와 주민들을 소집해 설 년까지 무려 400년간 지속되었다. 스
결한 신앙으로 물들이려 했다. 스페인 남 명한 뒤 ‘은혜의 기간’을 선포한다. 이 기 페인에서 종교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은
부의 세비야와 코르도바는 ‘사악한 이단 간 중 죄를 고백하면 비교적 가벼운 형벌 30~200만, 산 채로 불태워진 사람은 4
자’들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두 곳은 당 이 내려지지만, 기간이 지나면 본격적으 만 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다.
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유대인과

히랄다 탑 (La Giralda) 대성당 옆에 우뚝 솟은(약 100m) 이 탑은 원래 이슬람 대사원(모스크)의 종루였다가 대성당의 종루로 바뀌었다.
꼭대기까지 계단 없이 비탈길로 되어 있다. 술탄(이슬람 군주)이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대심문관의 추궁에 예수는 사랑으로 응답하다

세비야에서 100명이 화형당한 다음날 어제 100명을 화형대로 보낸 대심문관이 을 주고 있는 것이오. 나는 내일 당신을
예수가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었다. 그는 근위대에게 체포를 지시했다. 화형에 처할 것이고, 내가 손끝을 까딱하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지만 사 사람들은 벌벌 떨며 땅에 엎드려 머리를 기가 무섭게 어제 당신을 따르던 그 사람
람들은 그의 미소만으로도 예수인지 알 조아렸고, 예수는 종교재판소(지금의 산 들은 당신을 태울 장작불에 석탄을 집어
아차렸다. 눈에서 광채와 함께 교화의 힘 호르헤 성)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넣기 위해 달려들 거요.”
이 흘러나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손
을 내밀어 축복하면 장님이 눈을 뜨고 앉 어둡고 뜨겁고 숨 막히는 밤, 감옥의 철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어떤 답이라도
은뱅이가 일어났으며, 옷자락만 스쳐도 문이 열리고 추기경이 나타나 심문을 시 들으려 했지만 예수는 오직 침묵과 자비
치유의 힘이 전해졌다. 작했다. “당신은 이미 1500년 전에 할 말 의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심문이 끝나
을 다했고, 모든 것을 교회에 위임하고 자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다가가 조용히
그는 세비야 대성당 앞에서 걸음을 멈 갔는데, 왜 이제 와서 우리를 방해하고 입을 맞췄다. 대심문관의 입술이 파르르
췄다. 한 어린이의 시신이 성당 안으로 있는 거요?” 예수는 말이 없고 심문은 계 떨렸다. 그것은 죄인의 전율! 신의 자녀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어머 속되었다. 대체로 다음 내용이다. “당신 들을 화형대에 올린 죄인에게조차 어떤
니가 애원하자 예수는 1500년 전에 그랬 은 악마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고 그걸 복선도 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응답하자
던 것처럼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 거부했지만 당신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 한 가닥 양심이 움직인 것이리라.
이라고 외쳤고, 소녀는 관에서 벌떡 일어 아무도 없소. 당신은 빵과 기적과 권세를 대심문관은 말을 맺었다. “여기서 사라지
났다. 성당 앞은 비명과 흐느낌으로 가득 뿌리치고 영혼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사 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절대
차고 사람들은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 람들은 당신이 거부한 바로 그것들을 원 로!” 예수는 어두운 도시 속으로 사라졌
서)’를 외쳤다. 한 사람이 군중들 뒤에서 하고 있소.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 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대심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는 문관의 이야기다.

알카사르(Alcazar) 웅장한 건물들과 대정원으로 이루어진 알카사르(왕궁)는 10세기에 무슬림 총독의 궁전으로 시작되어
최근까지 계속 증축되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쌍벽을 이루는 대작으로, 제각기 다른 풍의 건축양식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은 알카사르 정원의 일부.

세비야가 수많은 오페라의 무대가 된 이유

여름에 예사로 45℃를 오르내리는 스 전 200년 경 북부의 산에서 채굴한 금 산 호르헤 성(Castillo de San Jorge) 감옥
페인 남부의 뜨거운 도시 세비야. 규모 은 광석들을 운반하기 위해 닦았다. 마 을 겸한 종교재판소. 이곳에서 고문과 함께 이
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 이 차로 세비야에 도착하면 그걸 배에 실 단심문이 이뤄졌다. 이단임이 명백해진 사람은
어 네 번째지만,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 어 로마로 보냈다. 세비야에 흐르는 과 산 프란시스코 광장으로 끌려가 최종재판을 받
로 꼽힌다. 유명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 달키비르 강이 지중해로 연결되기 때문 았다.
발사’ ‘카르멘’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 이다. 그런 지형 덕분에 세비야는 중세
니’ ‘피델리오’ 등의 무대가 바로 세비야 의 대항해, 대탐험의 기지였다. 콜럼버
다. 무려 100개 이상의 오페라가 세비 스가 세 척의 배를 띄워 아메리카로 출
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 발한 곳이 세비야다. 그러니 그때 이 도
만큼 세비야가 연애, 성(性), 암투, 복 시가 얼마나 번성했겠는가. 당연히 무역
수, 방탕, 참회 등 오페라의 소재로 가 과 상업의 중심지여서 술집과 식당, 무
득 찬 유혹의 도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회장이 즐비했고 갖은 축제와 향락이
넘쳤다. 게다가 이슬람과 유대의 문화까
스페인에 ‘은(銀)의 길’이 있다. 세비 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으
야에서 시작해 북부의 대서양 연안도 니 오페라의 무대로 제격이었던 것이다.
시 히혼(Gijón)에 이르는 길이다. 기원

옛 담배공장(오페라 ‘카르멘’의 무대) 비극의 주인공 카르멘이 일했던 알카사르 내 ‘처녀들의 안뜰’ 알카사르 내부 페드로 궁전의 부속 정원
담배공장. 지금은 세비야 대학 법학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페라에 으로 ‘처녀들의 안뜰(파티오)’이라고 불린다. 대리석으로 덮여져 있던 것
등장하는 다른 장소들도 모두 이 주위에 있다. 을 최근 고고학자들이 발굴, 본래의 정원으로 복원시켰다.

산타 크루즈 지구 대성당 인근의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이어진 곳으 산 프란시스코 광장 심문 결과 거의 이단임이 드러나면 이곳 광장에
로, 옛날에 유대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있고 서 모든 성직자와 주민이 모인 가운데 최종재판을 받았다. 재판이 끝나
카페와 식당, 샵들로 가득한 매력적인 거리다. 면 지금의 버스터미널인 산 세바스찬 거리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과달키비르 강의 야경 세비야를 흐르는 강으로, 지중해로 빠져 나간 플라멩코 춤과 노래, 기타반주가 어우러진 스페인 남부 전통예술. 플
다. 스페인에서 바다까지 배로 연결되는 유일한 강이다. 콜럼버스도 여 라멩코의 총본산인 세비야에는 수없이 많은 플라멩코 전문 클럽(피에
기서 배를 타고 가서 신대륙을 발견했다. 스타)이 있으며, 아카데미에는 세계 각지에서 지망생들이 찾아온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꼽힌다. 1929년 스페인 엑스포를 개최하기 위해 건축했다.
광장과 호수, 첨탑,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은 세비야 주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세비야, 500년 전의 빛과 그림자

세비야의 중심은 역시 대성당(Catedral) 다. 콜럼버스를 필두로 수많은 정복자들 금메달을 딴 바르셀로나 올림픽 그리고
이다. 가톨릭이 무슬림을 축출한 뒤 이 이 세비야에서 출발해 아메리카로 건너 세비야 엑스포다. 그 500년 전인 1492
슬람 대사원(모스크)을 허물고 그 자리 가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는데, 당시 그 년, 스페인의 가톨릭은 이베리아 반도에
에 지었다. 1402년에 시작해 1506년에 대 들은 피부와 언어와 종교가 다른 신대 서 무슬림과 유대인을 완전히 축출, 국
역사를 마무리한 이 성당은 로마의 성 륙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 토를 회복했고 콜럼버스의 배를 띄웠
베드로(바티칸), 런던의 세인트 폴에 이 다. 그곳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총 다. 500년 뒤 열린 엑스포의 주제는 ‘발
어 세계 세 번째 규모이고, 고딕양식 성 칼과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로 목숨을 잃 견의 시대’였다. 주제가 ‘참회의 시대’였
당으로는 가장 크다. 실제로 가서 보면 었다. 무슬림과 유대인을 내쫓고 순결한 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보다 더 많
그 위용에 압도당하고 만다. 주위의 높 가톨릭 왕국을 세운 스페인은 아메리카 은 참화를 겪고 20세기에 놀라울 정도
은 곳에 올라가서 카메라를 대도 렌즈 까지 뻗어가 무적함대의 시대를 연 영광 로 우리와 닮은꼴의 역사를 경험한 스페
에 전모가 들어오지 않는다. 스페인뿐 의 도시 세비야에 ‘훗날 사람들이 미쳤 인은 과거를 치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가들이 건축에 참 다고 할 성당’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세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인식의 근본적인 대
여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 비야 대성당 … 그곳에는 건축미학에 대 전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
다. “훗날 사람들이 우릴 미쳤다고 말할 한 경탄과 씻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한 전 다. 그것이 오늘날 스페인을 비롯한 유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을 짓자.” 율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보존되 럽 여러 나라에서 테러가 빈번한 원인이
어 거울처럼 암흑기를 비추어 주고 있다. 기도 하다. 과거의 빛과 그림자를 되돌
성당에는 그곳이 단지 성소가 아니라 아보게 하는 도시, 세비야를 축복하며…
권력 그 자체임을 증명하는 물건이 있 1992년 스페인에서 기념비적인 행사
다. 스페인 왕국들의 네 명의 왕이 콜럼 두 개가 열렸다.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 다음 호에 계속)
버스의 관을 떠받들고 있는 조각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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