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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9-19 00:51:40

발행인칼럼_12

발행인칼럼_12

발행인 칼럼 12

그의 죽음

그의 죽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군요.”
죽음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한 사람이 신문을 들고 와서 부음을 전했다. 법원의 동료
명석하고 냉정하고 똑부러진 판사들은 예의 침통한 표정을 짓고 안타깝다는 눈빛을 교환
그도 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하더니 이내 저마다의 머릿속은, 그의 공석(空席)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렸다. 죽음 앞에서 자리가 어떻게 바뀔지 계산에 분주했다. 그들은 그의 절친
그의 행복했던 과거는 재구성 한 동료들이었고, 그에게 신세를 많이 진 친구도 있었다. 그
되었다. 진짜 솔직하게 삶을 들은 추도식에 참가해 늘 그랬듯이 정중한 예를 갖췄고 미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망인에게 깊은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동료 판사의 시신을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보았을 때 그들은 한편 안도감에 휩싸였다. 저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라는 사실에. 추도식이 끝나자
106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날 밤도 카드놀이 약속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사람, 환상적인 인생
그는 명석하고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며 할 도리를 다 하

는 사람이었다.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법관
에 임용되어서도 공직 생활에 큰 흠결이 없었을 뿐만 아니
라 업무처리가 뛰어나 승승장구했다. 책임감 강하고 일처리
가 똑 부러지며 부드러운 품성에 사교성까지 갖춘, 그야말
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법원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뒤로는 부정한 행위도
했지만 그것도 남들처럼 과하지 않았고 적당한 선에서, 말
하자면 품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로 한정되었다. 군더
더기 없고 엄정하기 그지없는 말끔한 일처리, 공사(公私)를
뒤섞지 않고 각각의 영역을 확실히 정리하는 탁월한 수완이
있었다. 맘만 먹으면 누구의 인생을 헝클어지게 할 수도 있
고 돈도 꽤 챙길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
적으로 남용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스타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법
관 초반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위가
올라가면서 수입도 꽤 괜찮아져 지성과 경제력을 함께 갖춘

엘리트 그룹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드 박경욱
나들던 사교클럽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인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리커버리) 대표
이 그의 배우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세인이 부러워하
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병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집에 돌아가 자신의 지
성을 총동원해 의사들의 코멘트를 면밀히 분석해보았
하지만 그 역시 행복한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지만, 치료전망에 대한 어떤 힌트도 찾을 수 없었다.
못했다. 이기심 많은 아내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고, 아내는 갈수록 요구사항 거북한 증상은 통증으로 발전했고 시간이 지날수
이 많아졌고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판사 중에서도 조 록 통증은 심해졌다. 이거 아닌데, 아닌데 하는 이상
정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그는 결혼생활 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표현만 바
에서도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 아내와 적절한 선에 뀌었을 뿐 여전히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경과를 좀
서 타협하여 서로가 상대의 생활영역을 건드리지 않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
고 사는 것으로 갈등을 관리했다. 그는 삶의 무게중심 고 음식을 조절하는 등 관리가 중요하다는 따위의 말
을 일에 두고 매진해나갔다. 이었다. 뭐라 따질 수도, 답답하다고 해서 교양 없이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가 다루었던 피고들이 그랬을
부부는 은밀한 적개심의 바다에서 공생하는 사이 것이다. 자신이 피고들을 대할 때와 똑같은 태도와 기
였다. 둘은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사교계에 드나들 법으로 의사들은 그를 다루고 있었다. 판사가 재판을
었으며 타인들 앞에서 다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 받으러 나간 신세가 된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의사를
이로 처신했다. 저축액이 쌓이고 승진으로 수입이 올 찾아가 봐도 정작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알아낼 수
라가자 꿈에 그리던 크고 멋진 집도 한 채 장만할 수 없었다. 그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의 병이 죽을
있었다. 하인을 둔 좋은 집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 병인지 살 수 있는 병인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위, 고상한 취미생활과 사교활동, 부부 사이 하나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좀 더 경과를 신중하
빼곤 모든 게 환상적이었다. 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

판사가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처지 그는 온 신경을 쏟아 자신의 몸 상태를 관찰해나갔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찾아 다. 조금이라도 몸에서 어떤 신호가 나타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집중해서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
왔다. 집안을 정리하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뒤부터
뱃속에 거북한 증상이 나타나더니 점점 심해져 어느
덧 불쾌한 상태, 좀 꺼림칙한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를
찾아갔지만 속 시원한 진단이나 처방이 나오지 않았
다. 다른 의사를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들은 엄
숙한 표정으로 직업의 권위를 실어 전문적인 용어로

107

이 주요일과가 되어버렸다. 사태는 조금도 개선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죽음은 멀지 않
지 않았다.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은 미래의 현실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감추고
공포심까지 덮쳐 진이 빠진 채 잠자리에 들었고 그나 있었다. 어느 날 법원 동료가 판결 문제로 그를 찾아
마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아내는 약 먹는 것 왔을 때, 죽도록 힘들었지만 하나도 내색하지 않고 으
을 빼먹지 말아야 하고, 좀 더 관리에 신경을 써야한 레 그랬듯이 냉정한 표정과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자
다는 둥 의사의 대변인처럼 말했다. 더욱더 아내가 보 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이 거짓, 그 자신과
기 싫어졌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거짓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해
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자신의 거짓, 주위의 거짓
어느 날 처남이 찾아와 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그의 곁에서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친구들도 뜸했
고 아내와 딸도 그 상황에서 반드시 건네야만 하는 걱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는 처남의 표정을 통해 자신 정 어린 몇 마디 말들과 의무사항에 속하는 몇 가지
이 지금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 알아차렸다. 죽음이 시중을 들었을 뿐 다들 나름 바빴다. 그는 눈앞에 아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하루 24시간 죽음이 머 른거리는 죽음과 씨름하면서 진정 위로해주고 이해
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직
럴 순 없는 거라고. 아, 이걸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단 한 사람, 하인 게라심만이 늘 한결같은 낯빛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그는 혼란에 빠졌다. 대소변을 가려주는 등 시중을 들었다. 어느 날 그는
하인에게 물었다. 귀찮거나 힘들지 않느냐고, 왜 그렇
정말 재수 없는 것은, ‘죽음’은 그에게 모든 것을 내 게 나를 잘 대해주느냐고. 하인은 나도 큰 병에 걸릴
려놓은 채 오직 죽음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 수 있고 언젠간 죽을 건데, 그걸 왜 힘들어해야 하냐
쩔 수 없이 온 신경이 죽음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고 대답했다.
회피하려 다양한 관심사를 만드는 등 방어막을 쳐봤
지만 소용없었다. 죽음은 그의 뇌를 온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혼자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난 조금씩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볼 땐 산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남들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삶, 지식과
경제력, 멋진 친구들, 주위의 좋은 평판…
부러운 삶이었다. 그 자신조차 그렇다고 믿는
한 판사의 내면을 무자비하게 발가벗기고,
그의 인생은 ‘진짜 삶’에서 점점 멀어져 온
과정이었다고 파헤쳤다. _사진 : 톨스토이
작(作) 「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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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사라졌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어느 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여겼던 순간들 주인공의 이름은 이반 일리치(Ivan Illich). 그의 이

을 모두 떠올렸다. 그때는 그게 좋게 느껴졌는데 지금 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임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시절 행복을 느꼈던 사 종을 눈앞에 둔 사람의 심리묘사에서 백미로 손꼽히
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마치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추 는 작품이다. 도처에서 톨스토이의 영적인 성찰이 번
억하는 것 같았다.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득인다. 톨스토이는 이반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
마찬가지인 인생에서 그의 과거는 허망하게 무너져 게 삶의 심오한 성찰을 촉구한다. 이 작품에 대해 문
내렸다. 다정해보였지만 은밀한 적개심으로 이어온 학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독자
결혼의 환멸, 아내의 이기심, 생명력이라곤 조금도 찾 들은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단 한 가지 메시지에 주목
아볼 수 없는 직장생활, 그런 날들에 공을 들이고 정 하게 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언젠가
성을 쏟고 그럴수록 더욱 생명력이 사라진 삶이었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 누구 겁주자고 하는
남들 눈에 비친 환상적인 삶은 전혀 문자 그대로 ‘환 소리가 아닐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막 살
상’에 불과했다. 라는 얘기도 아니고 심각하고 우울한 삶을 조장하는
메시지도 아니다. 더 재밌게, 더 값지게 살라는 뜻이
그는 혼자 말했다. “난 조금씩 산을 내려오고 있는 아니겠는가.
것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
던 거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볼 땐 산에 오르는 것이 우리에게 죽음은 먼 나라의 일이다. 예수나 부처는
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죽었을지언정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는 것은 있을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소설 속 이반의 친구들처럼
가까운 이의 장례식장에 가서 저 관 속에 누운 사람이
죽음은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제 그는 거 ‘내’가 아니라 ‘그’라는 사실에 안도하곤 한다. 장례식
짓을 벗고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고, ‘진짜 장에서도 ‘죽음’은 여전히 비현실의 세계, 우리는 눈을
삶’에서 멀어져왔다고 시인했다. 속으로 미워했던 아 감아버린다. 그러나 죽음은 느닷없고, 인정사정없고,
내를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음의 차별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파도가 모래밭
문제로 더 이상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겠다 에 남긴 발자국들을 지워버리듯이’ 심각하고 시시콜
고 생각했다.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눈앞 콜했던 과거사를 말끔히 정리해준다. 부자와 빈자, 악
에 둔 불쌍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용서를 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통증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가족의 눈에 하지만 죽음 없이는 편히 쉴 수가 없고, 무엇이 진
비친 그는 참담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어가 짜 중요한지 가릴 수가 없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
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로 마지막 말을 남긴다. “죽음 막 날이라면, 이 가정 앞에 설 때 우리는 부질없이 몸
은 끝났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을 혹사시키는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죽음은 진짜
거두었다. 와 가짜, 보석과 쓰레기를 확실하게 구분해준다. 그
앞에 설 때, 우리는 굳이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
아도 좀 더 의미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눈에 비
치는 근사한 삶이나 사회가 가르쳐준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내 ‘속’이 원하는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반은 말한다. “너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반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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