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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19 22:55:36

발행인칼럼_62

발행인칼럼_62

발행인 칼럼 62

시칠리아의 게으른 시간들

발행인 칼럼 62_ 박경욱(제이미파커스 대표)

시칠리아의 게으른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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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는 ‘대부의 고향 사보카’, ‘대부의 종언 팔레르모’에 이어 시칠리아 3부작의 마지막 편으로,
놓칠 수 없는 4개 도시들을 방문합니다. 아래 사진은 지중해 트라파니(Trapani) 해변의 수산시장과

그 광장입니다. 낮에는 일부 관광객 빼고는 사람이 없는데 해질 무렵이면 저렇게 몰려듭니다.
그리고 밤은 늦도록 길게 이어집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소득수준이 가장 낮아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지만 몇 배 더 큰 휴식이 있고 사람들의 친교가 있고 시간은
엉금엉금 기어갑니다. 시칠리아의 게으른 시간 속으로 초대합니다.

※지난 칼럼들을 보려면 <제이미파커스> 홈페이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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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팔루(Cefalu` ). 팔레르모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해안가에 있다.

영화의 땅 시칠리아는 <대부> <그랑블루> <일 포스티노> 등과 함께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명편 <시네마 천국>을 탄생시
킵니다. 꼬마 토토와 엄마 그리고 마을 극장의 영사기사 알프레도 아저씨가 나눈 완벽한 사랑과 이해, 이심전심의 깊은 신
뢰는 영화를 본 이들의 가슴을 떠날 줄 모릅니다. “삶은 영화가 아니란다. 사는 게 훨씬 더 힘들어” 그럼에도 끝까지 사랑,
이해, 신뢰를 잃지 않은 시칠리아 사람들의 이야기 <시네마 천국>은 팔라조 아드리아노와 이곳 체팔루(Cefalu` )에서 촬영
됩니다. 위 사진의 왼쪽 방파제 일대가 그 현장입니다. 체팔루 해변은 시칠리아에서도 햇볕이 가장 따갑습니다. 지난 3월
에 갔을 때 한동안 걷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골목으로 피했는데도 아주 피할 순 없었습니다. 빛바랜 집들과 길들을 따
라가면 아랍, 노르만, 비잔틴 등 갖가지 양식이 뒤섞인 대성당(세계문화유산)이 나옵니다. 성당 앞 노천 카페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 콜라까지 주문해 목을 축인 뒤 양말을 벗어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 도시에 딱 맞
는 음악을 듣습니다. 재즈 기타리스트 그랜트 그린의 1963년 작품 <Idle Moments>. 시간이 마법을 부립니다. 14분 50초가
한나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1970년대의 고향 풍경들이 지나가고, 시간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게으르게 흘러갑니다.

체팔루 대성당(Du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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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안의 트라파니(Trapani) 일대

소금도시 트라파니(Trapani) 주도(主都) 팔레르모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지중해 항구도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
까운 이탈리아 도시인 트라파니에서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까지(250km) 페리가 다닙니다. 2천3백 년 전, 지금의 튀니지 일
대를 지배한 카르타고 왕국이 이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부터 도시가 발달했습니다.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를 몰고 알
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트라파니는 그 격전지 중 한 곳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나아갈 때 관문(關門)인데다
가 최고의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었기에 일전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결국 승자인 로마가 트라파니를 차지하고,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에까지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렇듯 소금은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트라파니에서 마르살라
까지 30km는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천일염이 생산되는 ‘소금길’입니다. 걸어서 또는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고 그 장관을
즐길 수 있습니다. 기원전부터 번성했던 도시답게 음식도 유명합니다. 스파게티 토마토 소스(페스토 트라파네제)의 발상
지이고, 북아프리카에서 비롯된 쿠스쿠스 요리의 일가를 이룬 곳이기도 합니다.

트라파니 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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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Hera) 신전. 유노(Juno) 신전으로도 불린다

신들의 도시 아그리젠토(Agergento) 시칠리아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곳은 ‘문명’이라는 두 글자의 감이 확실히 잡히는 현
장입니다. 서구 문명의 요람이라고 하는 그리스 문명의 실체가 아그리젠토 평원에 있습니다. 위아래 사진들은 그리스 아
테네가 아니라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입니다. 일명 ‘신전의 계곡’에 가면 아테네에서보다 더 선명한 그리스 신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7개의 신전 중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입니다. 콘코르디아는
아그리젠토의 랜드마크일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1978년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표현
하기 위해 로고마크를 채택했는데, 파르테논이 아니라 콘코르디아 신전을 본떠서 만든 것입니다. 신전 아래에 ‘추락한 이
카루스’라는 청동상이 있습니다. 새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다가 태양열에 날개를 잃고 바다에 떨어져 죽은 이카루
스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고대유물이 아니고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의 최근 작품입니다. 신전의 계곡에는 심
지어 올림픽 경기장까지 있습니다. 관람석, 선수들의 숙소, 전망대 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그마치
2,500년 전에 이곳에 건너온 그리스인들의 유적이라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아그리젠토의 상징으로 그리스 신전의 대표 격인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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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 몰라에서 바라본 타오르미나(Taormina)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곳, 이오니아 해안의 타오르미나(Taormina)입니다. 시칠리아에 간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곳에 들릅니다. 여름엔 발 디딜 틈이 없어 겨울에만 두 번 가봤습니다. 저 아래 해안에서 구불구불
아슬아슬한 길을 타고 올라오면서부터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하고 심장이 멈추질 않습니다. 200m 절벽에 세워진 도시
앞에 코발트 빛 이오니아 해가 펼쳐지고 뒤로는 이보다 300m나 더 높은 카스텔 몰라(Castelmola)라는 산정마을이 있습니
다. 이 마을에서 바라본 타오르미나와 이오니아 해는 세상의 어떤 비경에 견줘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름답다는 소문에 예
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찾아왔습니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타오르미나를 가리켜 ‘천국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도시 역사는 2,700년이나 됩니다. 모든 거리에 멋진 가게들이 즐비하고, 바다 쪽으로는 호텔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도시의
압권은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2,300년 된 그리스 극장입니다. 이오니아 해와 인근도시 그리고 여전히 폭발 중인 에트나
화산까지 모두 조망되는 6천석 규모의 극장에서는 지금도 공연이 열립니다. 2년 전 타오르미나에서 세계 정상회의(G7)가
열렸을 때 이 극장에서 정명훈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밀라노)를 지휘했습니다.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BC 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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