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85
밤을 위해 탄생한 도시 헨트(Gent)
레이어(Leie)강이 흐르는 헨트
발행인 칼럼 85_ 박경욱(제이미파커스 대표)
밤을 위해 탄생한 도시 헨트(Gent)
나그네 홀리는 밤의 도시 지난 5월 9일 점심 때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Deauville)을 출발, 410km를 달려 벨기에 헨트(Gent)로 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저녁 먹고 밤늦게 시내를 돌아다녀보니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감이 딱 온다. 유럽의 수백 개 도시를 가봤는
데, 밤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도시는 없었다. 헨트에서 1시간 거리에 브뤼셀, 브뤼헤, 안트베르펜 등 벨기에가 자랑하는 멋진 도시
들이 있지만 밤의 고혹으로는 헨트에 댈 수가 없다. 헨트의 밤은 조명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었다. 이 도시에 불야성은 없다. 가로등
이 드물뿐더러 사람을 향해 때리는 직접조명도 없다. 모든 불빛이 아래에서 위쪽을 향하고 있다. 안에서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빛도
없다. 조명을 받은 중세 건축물들만이 어둠이 깔린 도시에서 별처럼 빛나는 풍경들 … 이 지면에 수록된 사진들을 보라.
성미카엘 다리의 낮(위 사진)과 밤
헨트 레이어강 그라스부르크(Grasbrug 다리)에 내린 밤
레이어강 양안에 건설된 중세도시의 걸작 헨트(Gent)는 한국인이 많이 찾는 브뤼헤(Brugge)와 함께 플랑드르(Vlaanderen) 지
방을 대표하는 도시. 두 도시 모두 벨기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로 꼽힌다.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벨기에 공용어인데,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어 사용 지방을 말한다. 북해에 닿은 지역은 서(西)플랑드르, 그 내륙 쪽은 동(東)플랑드르이며, 헨트는 동플랑
드르의 수도. 프랑스어로 ‘강(Gand)’, 영어로 ‘겐트(Ghent)’라 불리고, 3개 명칭 모두 통용된다. 헨트의 역사는 깊다. 이미 로마 이전
에 도시가 만들어졌고, 13세기에는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현재 인구 26만4천 명의 큰 도시를 중세 건축물이 가득
메우고 있다. 도시 한복판을 레이어(Leie)강이 가르고, 좌우 양안에 중세의 헨트가 건설되어 있다. 밤이 되면 시민들이 강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4박 5일 동안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라곤 밖에선 들을 수 없도록 데시벨이 조절된 보트투어
해설뿐이었다. 사람 소리, 차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가 중세 거리를 음악처럼 지나간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예술전시장!
헨트의 중세 스카이라인을 잇는 세 첨탑. 왼쪽부터
니콜라스 성당, 헨트 종탑, 바프 성당.
영화 <모뉴먼츠맨>의 한 장면
히틀러에게 약탈된 예술품 구출작전 1943년 6월 23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랜시스 테일러
(Francis Henry Taylor) 관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의 특수목적 부대 <모뉴먼츠맨 The Monuments Men>의 창설을 승인한다. 이
들의 임무는 히틀러에게 약탈당한 유럽의 문화유산들을 구출하여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조지 클루니가 제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2014년 영화 <모뉴먼츠맨>에 그 활약상이 잘 그려져 있다. 영화에서 부대 창설을 주도한 중년 학자로
나오는 조지 클루니의 대사 한 대목을 소개한다. “한 세대를 완전히 말살하고 집들을 불태워도 국가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유산을 파괴해버리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게 된다. 히틀러가 노리는 게 바로 그거다. 우리가 막아야
한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나치군은 모든 유럽전선에서 무너져 베를린으로 퇴각한다. 히틀러는
예술품들을 모조리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황이 긴박해졌다. 실제로 나치가 문화재들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침한 불빛들이 헨트의 밤을 예술품으로 빚어낸다
헨트 중심가 NT Gent(시립극장)의 밤
소각 직전 구해낸 바프성당 제단화 각 예술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모뉴먼츠 부대는 연합군 진격로를 따라다니면서 약탈된 예
술품들을 추적한다. 모두 일급 문화재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인류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유화 걸작 <어린 양에 대한 경배>만큼은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이 작품은 헨트의 바프(Baafs)대성당 제단화였다. 모뉴먼츠 부대는 첩보공작을 통해 독일 남부 노이슈반슈
타인성과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소금광산에 트럭 80대 분량의 예술품들이 은닉된 것을 알아내고 두 곳을 덮쳤다. 가서 보니 미켈
란젤로의 성모자상을 비롯해 렘브란트, 다빈치, 세잔, 르누아르, 베르메르의 작품들과 바프대성당 제단화까지 상상할 수 없는 가
치를 지닌 문화재들이 자그마치 트럭 80대 분량이나 되었다. 모뉴먼츠 부대는 알타우세 소금광산에서 바프대성당 제단화를 찾아
내 특수 고안된 밧줄과 도드레, 수레를 이용해 성당까지 운반했다. 구출작전 와중에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실화다. 영영
사라져버릴 뻔 했던 명작들을 지금 유럽의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건 모뉴먼츠 부대의 활약 덕분이다.
알타우세 광산에서 바프대성당
제단화를 찾아낸 모뉴먼츠
대원들(1945년 기록사진)
되찾은 헨트의 영혼 벨기에의 반 에이크 형제가 1432년에 완성한 <어린 양에 대한 경배>는 헨트 바프대성당의 제단화로 바쳐졌
다. 값어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불후의 걸작이라고 한다. 100여 명의 인물과 50여 종의 식물이 등장하는 3.5×4.5m 크기의 유
화인데, 우선 사진보다 더 정교하다는 데서 놀라게 된다. ※위 사진은 총 12개 패널 중 한 개로 작품의 중심부다. 여기서 ‘어린 양’
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분, 예수를 의미한다. 어린 양의 몸에서 세상의 죄를 씻는 피가 흐른다. 이 작품은 예수가 인간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피를 흘리며 죽는 것부터 다시 세상에 오는 것까지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전체 줄거리는 인간의 모든
죄가 어린 양(예수)이 흘린 피로 용서되고(구원의 신비), 그 구원의 신비를 경배하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이 순례한다
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이미 18세기에 나폴레옹 군대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전력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히틀러의 지시로 나치
군대가 약탈했는데, 미군 특수부대 모뉴먼츠맨이 구출해 바프대성당에 되돌려 놓았다.
바프대성당 뒤편 에이크 형제 동상
온통 금빛으로 물든 헨트 시청사
어둠과 불빛과 고요에 잠긴 도시의 생기 헨트는 도시를 빛내는 수많은 건축물들 중에서도 헨트 종탑, 성니콜라스 성당, 성바프
성당 등 세 첨탑이 만들어내는 중세의 스카이 라인으로 유명하다. 헨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풍경을 지닌 도시로 만들어
내는 건축물로 시청사도 빼놓을 수 없다. 수백 년에 걸쳐 지어진 시청사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1100년에, 건물 중심부는 1539년에
완성되었다. 시청사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조명들을 보라. 벽면 구석구석이 모두 예술품들이다. 따로 시간 내서 공부하지 않는 한
대략 큰 그림만 이해할 뿐 저 속에 깃든 예술 디테일들을 알 수가 없다. 이 건물을 사진에 담기 위해 방문객들이 몰려온다. 헨트는
고요하면서도 활기차다. 도시 전체가 어둠과 빛과 침묵 속에 잠겼는데도 곳곳에서 두런두런 적당한 데시벨의 이야기들이 오간다.
수없이 늘어선 맥주바들이 그 장면을 보여준다. 지금도 적막 속에 생기가 도는 헨트의 밤이 아른거린다. 도시의 예술을 더욱 예술
로 빛내준 거리의 불빛, 그 밤의 수준! 나는 다시 찾아갈 것이다. 매혹의 밤을 보기 위해.
성미카엘 다리 옆의 옛 우체국 건물.
지금은 호텔 <1898 The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