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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06 21:51:02

발행인칼럼_40

발행인칼럼_40

발행인 칼럼 40_ 스페인 기행④ 톨레도 (Toledo)

스페인의 심장,
고도(古都) 톨레도

발행인 칼럼_ 40

스페인 기행 ④ 톨레도 (Toledo)

스페인의 심장, 고도(古都) 톨레도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비사그라 문 Puerta de Bisagra

산토 토메 성당
Iglesia De Santo Tomé

67km 마드리드 Madrid 과달키비르 강변 ‘황금탑’ 13세기 초 무슬림 왕조 때 지은
톨레도 Toledo 선박 감시탑. 이 탑과 강 건너편에 쇠사슬을 걸어 선박 통행
저곳이 바로 고도(古을都통) 톨제했레다도.(당To시le에do는). 탑2~의3시꼭대간기이에면금둘빛레도를자기한를바얹퀴어돌
수 있는 작은 도시지만빛위났기엄에이황예금사탑롭이지라는않이다름. 톨이레붙도었다를고‘스한페다인. 의 심장’이라
고 부르기도 하고, 스페인에서 딱 한 곳밖에 여행할 수 없다면 톨레도를 가
라는 말도 있다. 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대략 감이 잡힌다. 톨레도는 옛날
에 스페인의 수도였고, 더 중요하게는 ‘스페인 정신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
서 가톨릭이 국교로 선포된 것이다. 지금도 톨레도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
산이다. 사진 정중앙의 회랑(回廊)식 건축물이 대성당(카테드랄)이다. 그 오
른쪽으로 언덕에 묵직하게 세워진 건물은 알카사르(성채)이며, 더 오른쪽으
로 보이는 타호 강(Río Tajo)은 도시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다.

알카사르 Alcázar

타호강 Río Tajo

톨레도 대성당 Cathedral

알칸타라 다리 Alcant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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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의 한평생, 오르가스 백작이 묻히는 날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수많은 성인들이 천상에서 그의 영혼
을 기다리고 있다. 다들 영혼이 승천하는 하늘을 쳐
다보거나 백작의 시신을 내려다보는데 한 사람만 정
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사람은 엘 그레코 자신이다.
그림에서 한번 찾아보라.


톨레도 대성당에 걸린 그레코의 대표작. ‘옷 벗김의
수난을 당하는 예수’

톨레도의 영혼,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톨레도에 와서 이 그림을 놓친다면 톨 정화가로 발탁되어 스페인으로 왔다. 그 가 그레코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후손들
레도를 헛본 셈이다. 산토 토메(Santo 의 그림은 당시로선 너무 전위적이어서 이 오르가스 백작의 숭고한 뜻을 따르도
Tome)라는 성당에 걸린 이 그림 ‘오르가 채택되지 못했다. 궁정에서 실패한 그레 록, 그의 메시지를 표현해달라는 주문이
스 백작의 장례식’의 작가는 엘 그레코 코는 톨레도로 옮겨가 죽을 때까지 거기 었다.
(1541~1614). 그 휘황한 톨레도의 모든 서 그림을 그렸다. 종교화를 전공한 그레
유산을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재산 코는 이 도시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오르가스 백작이 묻히는 날 천상에서
이다. 톨레도 사람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톨레도에서 만들 예수가 굽어보고, 성모 마리아가 백작의
대접하는지, 스페인 내전기(1936~1939) 어졌고,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오직 톨레 영혼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며, 성인
의 한 장면을 소개한다. 톨레도는 당시 도에 가야만 볼 수 있다. 톨레도를 사랑했 들이 백작을 묻기 위해 내려와 있고, 톨레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 군대의 수중에 있 던 그레코는 죽어서도 톨레도의 영혼이 도의 중요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었다. 이 도시는 내전 막바지에 공화파에 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백작의 시신이 관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포위되어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았다. 엘 이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어두운 그림
그레코의 대작이 걸린 산토 토메 성당도 이 그림에서 관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이지만 몇몇 곳은 밝게 처리해 강렬한 대
폭격을 받아 한쪽이 무너져 내리자, 이 은 ‘오르가스’라는 백작이다. 그는 살았 비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로 3.6m
도시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가 을 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선 ×세로 4.8m의 큰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
그림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림을 지 행을 베푼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든 사람들은 실제 크기와 비슷하다. 다들
켜냈다. 자신의 재산으로 성당을 짓고, 성당을 지 영혼이 승천하는 하늘을 쳐다보거나 백
은 뒤에도 계속해서 지원하겠다고 유언 작의 시신을 내려다보는데 한 사람만 정
그리스 사람인 엘 그레코는 베네치아 을 남겼다. 하지만 후손들은 약속을 지키 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사람은 엘 그레코
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마드리드 인근에 지 않아 급기야 성당과 법정분쟁까지 가 자신이다. 그림에서 한번 찾아보라.
대수도원(엘 에스코리알)을 지을 때 궁 서 지고 말았다. 그때 이 성당의 한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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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대성당, 오른쪽이 알카사르(성채)다. 500년 전의 건축물인데도 옆 사진에
서 보는 것처럼 외관이 낡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때 폭격을 받아 잿
더미가 된 것을 내전 후에 복원한 것이다. 톨레도는 스페인 내전 중 가장 참혹한
전투현장이었다.

알카사르 : 중세의 요새, 20세기 내전의 참화 현장

스페인에는 무수히 많은 ‘알카사르 던 이곳은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회복 다. 공화파는 톨레도를 포위한 뒤 반란군
(Alcázar, 성채)’가 있다. 한때는 그 수가 1 한 뒤 알카사르로 재건했다. 그런데 사 의 군사거점인 알카사르에 맹폭을 가했
만 개나 되었다고 하고, 지금은 2천여 개 진을 보면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 고, 이 건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톨
가 남아 있다. 그리고 알카사르의 대부 인다. 그렇다. 최근의 건축물이다. 프랑 레도 전투는 내전 중 반란군의 가장 영
분이 스페인의 중앙부에 있다. 그만큼 이 코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 웅적인 방어전으로 꼽힌다. 맹폭을 받아
지역에서 전쟁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아 (1936~1939)은 한국전쟁과 함께 20세기 떼로 목숨을 잃으면서도 톨레도를 지켰
랍어에서 유래한 알카사르는 성, 성채, 의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꼽힌다. 스페 다는 것이다. 결국 내전은 반란군의 승
요새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무슬림에게 국 인 전 국민이 남녀할 것 없이, 심지어 한 리로 끝나 스페인은 20세기의 40년 동
토를 뺏긴 뒤 가톨릭은 북쪽 산악지대에 집안에서도 좌우로 갈려 싸웠고, 3년 동 안 유럽의 고립된 섬으로 살아야 했다.
서 힘을 길러 아래로 내려와 중원에 해 안 거의 100만 명 가량 목숨을 잃었다. 그 참혹했던 대표 현장이 이곳 알카사
당하는 이 지역에서 아랍세력과 사생결 내전과 전후 독재, 민주화, 경제성장 등 르다. 내전이 끝난 뒤 원래 모습대로 완
단을 냈다. 무슬림으로부터 도시를 회복 이 나라의 현대사는 놀랄 만큼 우리와 벽하게 복원되었고, 지금은 내전을 보여
하면 반드시 그곳에 알카사르를 세워 거 비슷하다. 이 알카사르는 내전 때 격전 주는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
점으로 삼아 도시를 방비하고 다음 전투 지였다. 그곳은 프랑코 반란군의 병사들 음 호엔 스페인 내전기의 현장으로 간다.
를 준비했다. 본래 로마인들의 궁전이었 을 육성하던 사관학교로 쓰였기 때문이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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